이승하 시인의 ‘내가 읽은 이 시를’ (61) / 아름답고 건강한 여성의 초상 – 고경숙의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이승하 시인의 ‘내가 읽은 이 시를’ (61) / 아름답고 건강한 여성의 초상 – 고경숙의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 이승하
  • 승인 2023.03.02 04:00
  • 댓글 0
  • 조회수 182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진=한송희 에디터
사진=한송희 에디터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고경숙

일곱 살 겨울방학은 아랫목에 배 깔고 졸기 딱 좋았다 부엌에서 소리치는 엄마에게 불려나간 큰언니가 던지고 간 잡지, 펼쳐진 『스타 스토리』에 들어있던, 엄마와 다르고 언니와 다르고 나와 다른 여자, 큰 눈과 큰 입과 큰 가슴으로 공주도 마녀도 아닌 그 중간쯤에 도시도 아니고 시골도 아닌 바닷가 어디쯤에 서서 나를 노려보는 것도 바라보는 것도 아닌 멍한 시선으로 긴 다리를 늘어뜨리고, 부끄러운 일곱 살이 먼저 고개를 돌리고 덮었다 다시 펼치게 만드는 그 여자의 이름을 파헤쳐보려고 읽다가 몇 번이나 넘어졌던 그 이름, 그 여자 이름이 뭐더라 궁금해하는 내게 다음 날 스무고개라도 하듯 언니는 물었다 이뻐? 별로, 미국배우야? 몰라, 섹시해? 섹시가 뭔데? 
언니마저 가버린 빈 방에서 그 여자 이름이 자유롭게 발음되었을 무렵, 잡지는 엄마의 불쏘시개가 되고 슬픈 눈의 그녀도 서서히 잊혀졌다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고경숙 시집 『고양이와 집사와 봄』(시산맥, 2023)에서

사진=한송희 에디터
사진=뉴스페이퍼 제작, 영화 The Professional 1966

<해설>

 큰언니가 두고 간 잡지 『스타 스토리』에는 이탈리아의 여배우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실려 있다. 작은언니가 이 여성에 대해 궁금해하는 일곱 살짜리 동생에게 스무고개라도 하듯이 묻고 있다. 이뻐? 별로. 미국배우야? 몰라. 섹시해? 섹시가 뭔대? 일곱 살짜리 소녀의 눈에 비친 그 서양 배우는 공주도 마녀도 아니었다. 나를 노려보는 것도 바라보는 것도 아닌 멍한 시선으로 보고 있는데, 긴 다리를 늘어뜨리고 있고 큰 눈, 큰 입, 큰 가슴을 갖고 있다. 분명한 것은 그녀가 엄마와 언니와 나와 전혀 다르게 생겼다는 것이다. 왠지 그 사진 속의 여성이 슬픈 눈을 갖고 있다. 

 CC(애칭)는 1938년 4월 15일생인데 작고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장수하고 있는 셈인데 2020년에 스위스에서 미니시리즈 <Bulle>에 출연했으므로 배우로서도 장수하고 있다. 2010년 제47회 안탈리아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음으로써 노익장을 자랑하였다.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는 청순가련형이 아니라 밝고 건강한 인상을 준다. 출세작 <부베의 연인>에서 14년형을 받고 복역하는 애인이 출옥하는 날까지 씩씩하게 기다리는 여성으로 출연해 강한 인상을 주었다. <형사>, <가방을 든 여인>에서도 비슷한 성격의 여인 역을 맡았다.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은 적이 있었는데 첫 남편과는 혼인신고도 하지 않고 헤어졌다. 아이를 동생으로 호적에 올려 키우다 뒤늦게 고백하였다. 내가 네 누나가 아니라 사실은 엄마라고. 다음에 만난 남자와는 결혼해서 42년 동안 살다 사별하였다. 새 남편과는 사이에도 아이가 하나 있다. 40년 내내 스캔들이 없었고 할리우드식 삶에 환멸을 느껴 미국보다는 유럽에서 활동하였다. 페미니스트와 동성애자를 지지해 온 정치적 진보주의자로 유네스코 여성인권옹호 홍보대사로 활동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의 여주인공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사랑의 탐구』, 『우리들의 유토피아』,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공포와 전율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