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루무치에서 투루판까지
—혜초의 길 31
이승하
길 물으니 다음 마을까지는
또다시 일백 리 황무지 길이라 한다
돌아보니 길은 모래바람에 사라지고
걷다보니 길은 끊겼다가 다시 나타난다
사람 사는 마을 그 어디를 가도
늘 들을 수 있는 웃음소리와 울음소리
골목길에서 노파는 손자 업고 흐뭇해하고
동구 밖에다 어미는 자식 묻으며 슬피 운다
하지만, 나의 길은 마을로 나 있지 않다
영원의 법(法)을 찾아 부르튼 발 앞으로 옮기면
서역의 하늘 끝은 사시장철 입 다문 지평선
가도 가도 인가의 불빛 한 점 보이지 않지만
어서 가자 밤을 도와 저 투루판 분지까지
넘어온 톈산산맥보다 더 아스라한 길을
오늘도 부지런히 걸어가야 하는 것은
내가 나서야 길이 비로소 길이기 때문
—『천상의 바람, 지상의 길』(서정시학, 2010)에서

<해설>
당나라에 유학을 가 있던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승려 혜초(704〜787)가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 순례에 오른 것은 723년이었다. 하필이면 중국 장안에서 만나 스승으로 모시게 된 스님이 금강지라는 인도인이었다. 인도어 경전을 중국어로 옮기는 국책사업의 인도어측 책임자였다. 금강지는 신라에서 유학 온 혜초가 똑똑한 것을 파악하고는 인도 여행을 제안하였다. 신라-중국-인도를 연결하는 불교의 전파자로 삼을 생각이었을 것이다.
혜초는 일단 배를 타고 중국의 남단 광쩌우를 출발해 캄보디아와 말레이반도와 스리랑카를 거쳐 인도 동부에 다다라 부처님이 태어난 곳과 도를 닦은 곳, 처음으로 깨달음을 얻은 곳, 설법을 시작한 곳, 최초로 세운 절, 입적한 곳 등을 두루 찾아보고 중앙아시아 드넓은 땅을 편력하기로 했다. 세상 구경이 힘들지만 재미있었다. 마침 여행하면서 다섯 나라로 나뉘어 있던 인도(5천축)의 풍경과 풍물, 풍습과 토양, 정치상황과 경제상황을 기록하다 보니 인도 북부 중앙아시아의 수많은 나라에도 가보고 싶었다.
혜초는 데칸고원과 파미르고원을 넘어 729년에 당나라로 돌아왔다.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을 보면 당의 안서도호부가 있던 쿠차(Kucha, 龜玆國)에 도착하는 727년 11월로 여정이 끝난다. 혜초가 4년 넘게 걸어간 거리는 짧게 잡아도 5만 리다. 양피지 두루마리에 쓴 여행기의 사본이 왜 하필 중국의 둔황석굴 안에 있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1900년, 둔황지역을 다스리는 청나라의 관리(성이 王씨였고 직급이 ‘도사’였다)가 어느 한 석굴의 안쪽 방에 고문서가 가득 쌓여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입구는 찰흙으로 밀봉되어 있었다. 왕 도사는 상부에 보고했으나 관리들은 낡은 문서에 관심이 없어 알아서 하라고 했다. 1905년에 러시아의 탐험대가 찾아와서 들고 갈 수 있을 만큼 챙겨서 갖고 갔다. 소문을 듣고 1907년에 영국의 탐험가 스타인이 찾아왔다. 그는 왕 도사에게 뇌물을 주고 1만 점 이상의 문서를 런던으로 가져갔다. 이듬해에 온 프랑스의 동양학자 페리오는 이들 고문서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일단 북경으로 오천 점 가량을 마차로 옮겼고 다시 프랑스 함선에 싣고는 본국으로 반출하였다. 그 속에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있었다. 프랑스는 우리나라 외교부가 거듭 요구하자 2010년도에 100일 정도 빌려주었다. 그것도 다 펼치지 않고 돌돌 말아서 일부만 전시하게 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인들이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 297권을 되찾아왔는데 혜초의 여행기는 왜 안 되는 것일까. 통탄할 일이다.
혜초가 걸어간 5만 리 여정을 생각하며 쓴 시다. 당나라도 낯선 땅이었을 텐데 인도는 오죽했을까. 게다가 중앙아시아 각국은. 말인들 제대로 통했을까 길인들 제대로 닦여 있었을까. 낯선 마을에서의 불편한 잠자리와 입에 맞았을 리 없는 식사. 지역에 따라 물맛도 달랐을 테고. 전염병 도는 마을도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다. 엄동설한 산악지방의 눈보라와 일망무제 사막지역의 모래바람을 맞으며 혜초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우기에는 열흘 이상 비를 맞으며, 건기에는 우물도 말라붙는 고원을 지나며 그는 걷고 또 걸었을 것이다. 모기와 빈대 같은 벌레한테 줄곧 물리면서, 물 한 모금을 갈망하면서. 기이한 풍광에 넋 잃은 것이 어디 한두 번이었을까. 땀과 먼지에 찌든 탁발승의 복장 또한 거지 꼴이었을 터. 신발이 닳으면 맨발로? 그런데 여행기 안에는 5편의 시가 나온다. 하나같이 명작이다. 이 땅 한시의 역사는 혜초로 말미암아 8세기 초로 끌어 올려져야 한다.
장안(현재의 시안)과 둔황 일대를 여행하고 와서 『왕오천축국전』을 읽었다. 나라 하나를 읽을 때마다 시심이 솟구쳐 시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혜초는 인도어 불전의 중국어 번역사업을 평생 하다가 중국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국내의 그 어떤 문헌에도 ‘혜초’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워낙 어릴 때 고국을 떠났고 영영 귀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사랑의 탐구』, 『우리들의 유토피아』,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공포와 전율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