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스크바의 밤
김왕노
빅토르 최의 노래를 듣는 밤입니다. 물론 반전의 노래 혈액형도 듣습니다.
지금은 빅토르가 노래를 부르던 모스크바의 밤
붉은 광장으로 흘러나간 노래를 레닌 동상도 듣고
끝없이 밖으로 새나간 빅토르의 최를 듣는 눈발도 리듬을 타듯
허공으로 오르내리다가 거리에 내려 가쁜 숨을 몰아쉽니다.
빅토르 최의 노래를 들으면 어둠은 멀고 오로지 빅토르 최의 노래
내 밤의 세상을 만들고 붉은 장미가 핀다는 붉은 광장도
그렇게 사람을 집결시키고 선동했던 한때의 이념도 나를 도저히
감동시키지 못하는 무용지물, 오로지 빅토르 최의 노래만 감동입니다.
눈은 쌓여가고 빅토르 최의 노래를 듣는 밤입니다.
빅토르 최의 노래를 들으며 닥터 지바고를 생각하거나
바람에 끝없이 머리카락 나부끼던 나타샤와 사랑을 꿈꾸는 밤입니다.
자유롭게 빅토르 최의 노래를 듣는 밤은 빅토르 최도 꿈꾸던 밤
휘날리는 눈이 적설을 이루어 가듯 빅토르 생각이 쌓여가고
난로에 불길은 타오르고 빅토르 최의 노래도 불길처럼 타오릅니다.
빅토르 최는 모스크바의 이방인이었습니다.
누대로 흘러온 그의 피는 우리에게 유전되어 간 피였습니다.
빅토르 최의 무덤에 싱싱하게 놓인 꽃다발이 떠나간 빅토르를 증언하나
멀리로 떠나가는 기차 바퀴 소리마저 눈 속에 묻혀 가나
빅토르 최는 시베리아 호랑이의 털 같은 부드러움으로
때로는 끝없이 몰아치는 블리자드 같은 노래로 살아 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듣는 노래는 빅토르가 살아서 부르던 노래
기타를 튜닝하고 긴 머리 자유롭게 나부끼며 부르던 노래
난 살아서 내게 들려주는 듯 생생한 빅토르 최의 노래를 들으며
밤에 종지부를 찍으며 혁명처럼 몰려올 새벽의 발소리를 기다립니다.
부르고 불렀으나 다 부르지 못하고 간 노래, 못다 한 노래
빅토르 최의 노래를 듣습니다. 물론 반전의 노래 혈액형도
눈발 끊겼다 이어지고 난로 위 주전자 물이 끓는 모스크바의 밤입니다.
ㅡ『백석과 보낸 며칠간』(천년의시작, 2022)에서

<해설>
시인은 러시아의 반전 가수 빅토르 최(1962〜1990)의 이른 죽음을 애통해 하고 있다. 러시아의 크로아티아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이 1년 넘게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빅토르 최는 1987년 레닌그라드 록 축제에서 「혈액형」이라는 곡을 발표하고 대상을 받았다. 이 곡이 수록된 앨범은 당시 아프가니스탄 분쟁에 뛰어든 소련에 반전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어서 대중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고려인이고, 어머니는 우크라이나인이다. 여러 차례 당국의 제지를 받으면서도 아마추어 록그룹을 조직했고, 1982년에 ‘키노(KINO)’라는 록그룹을 결성하여 활동했다. 당시에는 록음악이 환영받는 분위기가 아니어서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하다가 1987년 고르바초프의 개방정책으로 인해 서구와 교류가 쉬워지고 당국의 간섭도 누그러져 자유롭게 곡을 만들 수 있었다. 빅토르 최는 1988년부터 덴마크ㆍ프랑스ㆍ미국 등을 방문하여 공연했고 1990년에는 일본도 방문했다. 해외 공연을 자주 하며 자유를 경험한 그는 소련 사회의 변화를 바라는 열정을 끊임없이 분출하다가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죽음에 의문점들이 있어 살해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빅토르 최가 그렇게 원했던 것이 자유, 평화, 평등 같은 것이었다. 소연방 해체 이후 국가 간 갈등의 골이 깊어져 전쟁까지 하게 된 데 대해 시인은 빅토르 최의 음악을 들으면서 슬퍼한다. 밤이 가면 응당 새벽이 오고 아침이 오는데 전쟁은 도대체 언제 끝날 것인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러시아라는 나라는 멀지만 <닥터 지바고>라는 영화의 장면들이 환기해주는 것이 있어 가깝게 느껴진다. 이 소설을 쓴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도 노벨상 수상 소식에 처음에는 기뻐했다가 나중에 거부했는데, 국외로의 추방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김왕노 시인은 한 편의 시를 통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빨리 끝나기를 간절히 기원하고 있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사랑의 탐구』, 『우리들의 유토피아』,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공포와 전율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