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가 읽은 이 시를’ (69) / 짐승을 싸우게 하지 맙시다 – 이승하의 ‘소가 싸운다’
이승하 시인의 ‘내가 읽은 이 시를’ (69) / 짐승을 싸우게 하지 맙시다 – 이승하의 ‘소가 싸운다’
  • 이승하
  • 승인 2023.03.10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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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송희 에디터
사진=한송희 에디터

소가 싸운다

이승하

모래사장은 시방 엄청나다 
뜨거운 힘과 힘이 맞서 있다
쏘아보는 저 소의 눈이
링에 오른 격투기 선수 같다 
거품을 입가에 지그시 물고
앞발로 호기롭게 모래사장을 찬다
  
징이 울리자
힘이 힘을 향해 달려 나간다
사방팔방으로 모래가 튀고 
사람들의 함성…… 소와 사람의 힘이 팽팽하다
저놈이 지면 내 힘이 날아가고
저놈이 이기면 남의 힘이 내 힘이 되는 세상
한쪽 소의 뿔에 더 큰 분노가 실려  
다른 소의 뒷발이 밀리기 시작한다

힘으로 들이받자 힘으로 맞받는다
모래사장에 튀는 피 뿌려지는 침
쥐 죽은 듯 고요해지는 싸움판
침을 질질 흘리며 고통을 참던 소가
마침내 삼십육계를 놓자 
징이 울린다 싸움이 끝나자
한쪽은 더 큰 함성을 지르고
다른 쪽은 욕설을 내뱉는다

쫓겨 달아난 소가 못내 미운지
이긴 소 못 다한 힘을 어떻게 하지 못해 씩씩거린다 
이긴 소의 주인은 소 등을 어루만지고
진 소의 주인은 카악 가래침을 뱉는다  
푸른 지폐와 누른 수표가 오갈 때마다
사람들의 눈빛이 소의 눈빛보다
더 살벌하다 더더욱 분노로 충혈된다

ㅡ『나무 앞에서의 기도』(Km, 2018)에서

사진=뉴스페이퍼 제작
사진=뉴스페이퍼 제작

<해설>

봄이 되었으니 사람들이 소싸움 경기장에 많이 갈 거라 예상된다. 경상도의 청도, 창원, 함안, 달성, 진주, 의령……. 소싸움의 역사가 깊은 곳이다. 이기리라 예상되는 소에게 배팅하는 것이 불법이 아니다. 청도 등 몇 곳은 상설 소싸움 경기장을 만들어놓고 그 지역 관광 코스로 개발하였다. 

소의 얼굴을 보면 참 순하게 생겼다. 너무 순하게 생겨서 불쌍하기까지 하다. 초식동물인지라 다른 짐승을 잡아먹지 않고 풀만 먹어서 그런 것인지, 한평생 일만 하고 죽어서도 사람들에게 온몸을 먹잇감으로 제공해서 그런지 모르겠다. 움메에 하고 우는 울음소리도 내게 큰 감동을 준다. 그런 소를 싸움판으로 내몰아 뿔로 상대방을 들이받게 한다. 피를 보게 한다. 싸움판의 소는 상처투성이다. 인간이 뭐가 잘났다고 소를 싸움판으로 내모는 것일까. 인간은 소만 싸우게 하는 게 아니다. 투견과 투계의 역사도 아주 깊다. 로마 시대의 검투사는 또 어떤 존재였나. 인간을 싸우게 하고는 즐긴 것이 인간이었다. 프로레슬링과 격투기도 마찬가지다. 

동물애호가협회 사람들이 소싸움판에 가서 아무리 시위를 해도 소용이 없는데 이런 시가 발표되었다고 해서 경상도 일대에서 지금도 행해지고 있는 소싸움이 중단될 리 없다. 하지만 소가 주인의 명에 의해 싸움판에 뛰어드는 것이 보기에 너무나 안타까운 것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소의 큰 눈망울을 보면, 움메에 우는 울음소리를 들으면, 그저 목이 메는 것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사랑의 탐구』, 『우리들의 유토피아』,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공포와 전율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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