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가 읽은 이 시를’ (73) / 그리워라 윤동주 시인 – 나태주의 ‘윤동주 1’ ‘윤동주 2’
이승하 시인의 ‘내가 읽은 이 시를’ (73) / 그리워라 윤동주 시인 – 나태주의 ‘윤동주 1’ ‘윤동주 2’
  • 이승하
  • 승인 2023.03.14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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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송희 에디터

윤동주 1

나태주 


짧아서 슬프다

슬퍼서 오래
지워지지 않는 향기.


윤동주 2
 
아무것도 되지 않고 싶었고
아무것도 되지 않았던 사람

다만 사람이 되고 싶었고
윤동주 자신이 되고 싶었고

오직 소원이 있다면
시인이 되고 싶었던 사람.

ㅡ『좋은 날 하자』(샘터, 2023)에서

사진=뉴스페이퍼 제작
사진=뉴스페이퍼 제작

<해설>

 해설이 필요한 시가 아니지만 짧게 감상문을 써본다. 우리나라의 국민시인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윤동주 시인은 지상에 27년 1개월 16일 머물다 다른 세상으로 갔다. 후쿠오카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한 일제의 인체실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윤동주보다 훨씬 건강했던 4촌형 송몽규도 같은 형무소에서 3주 뒤에 죽었다. 일본의 교정협회(矯正協會)에서 낸 『전시행형실록』을 보면 이 교도소에서 1943년에 죽은 이가 64명인데 다음해에 131명으로, 그 다음해에는 259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급증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나태주 시인은 윤동주 시인이 생은 짧았지만 그의 시가 풍기는 향기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조금도 지워지지 않는다고 한다. 윤동주가 무슨 대단한 혁명가의 사명을 품고 일본에 유학 갔던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그는 이른바 ‘등단’이라는 것도 하지 않았다. 소년 잡지에 동시를 간간이 발표했었고 교내에서 내는 교지에 시를 몇 편 발표한 것이 전부였다. 시인이 될 꿈을 품고서 시를 제대로 써보고자 유학길에 올랐건만 일제는 도시샤대학 영문과 학생 윤동주와 교토제국대학 사학과 학생 송몽규가 작당해 독립운동을 모의했다고 2년형을 내리고 투옥, 주사를 놓으며 여러 가지 실험을 행하였다. 731부대가 하던 실험들이 전세가 불리해지면서 중단된 상태였다. 

 나태주 시인의 시구를 입증하는 시로 「아우의 인상화」가 있다. 형이 아우에게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하고 묻자 아우는 “사람이 되지”라고 답한다. 윤동주 또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윤동주 자신이 되고 싶었을 따름이다. 윤동주는 시 「참회록」의 여백에 이런 낙서를 해놓았다. “시인의 고백, 도항증명, 상급, 힘, 생, 생존, 생활, 문학, 시란?, 부지도(不知道), 고경(古鏡), 비애 금물” 

 일본으로 유학 가려면 도항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하는데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받을 수 없었다. 창씨개명을 하기 직전에 쓴 이 글을 보면 그는 아무 욕심이 없었고 단지 시인이 되고 싶었음을 알 수 있다. 윤동주가 죽은 날이 1945년 2월 16일 새벽 3시 36분이었다. 그 죽음의 과정을 추적해 책을 내기도 했었는데 나태주 시인의 두 편 시를 보니 윤동주의 순정함이 생각나 더욱더 비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사랑의 탐구』, 『우리들의 유토피아』,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공포와 전율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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