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븐숭이 수선화
양중탁
외진 산골 옴팡밭에 설운 풀꽃 피고 지고
반세기 푸른 혈기 벙어리처럼 가슴 앓다
다려도 열린 바람이
송이송이 피웠는가?
부모 형제 소식 몰라 헤매 돌던 언덕길에
칼바람 눈비에도 굳은 심지 하나로
그 세월 애만 태웠나!
애처롭다, 수선화여.
동지섣달 긴긴밤을 살얼음 호호 불며
애기무덤 바람막이 뜬눈으로 지켜 서서
가엾다, 감기 들세라
가려주고 덮어주고.
피바다 붉은 송이 처절했던 저 영령들이여
아픔일랑 꽃으로 피고 눈물일랑 가슴에 묻고
설원의 봄비 내리는
꽃동산을 만들자.
ㅡ『어떤 경영』(책만드는집, 2023)에서

<해설>
한 권의 시조집에 제주도 4ㆍ3사건을 다룬 작품이 10편이 넘는다. 제주도 사람들은 너븐숭이가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산간지역의 이름임을 다 알 것이다. 4ㆍ3사건 당시 이곳에서 부락민 400여 명이 한날한시에 무차별 학살당했다고 한다. 다려도는 북촌리 앞바다에 있는 자그마한 무인도다. 그때 죽은 어린이들을 묻고 돌을 쌓아 표시했는데 애기무덤은 지금도 그때 그 상태로 남아 있단다. 1936년에 제주도에서 태어난 양중탁 시인은 4ㆍ3사건의 산 증인이다. 연작시 「무법 천지」 8편 외에도 여러 편이 그날의 아픔을 증언하고 있다. 제주도 4ㆍ3사건의 원인, 과정, 결과는 역사적으로, 사회사적으로 살펴보아야 하겠지만 시인은 그때 억울하게 죽어간 수많은 사람의 영령을 위로하고 싶다. 명복을 빌고 싶다.
진실은 바로 이것이다ㅡ전쟁도 일어나기 전에 공산도배로 몰려 제주도민 3만 명이 동족의 손에 학살당했다. 오해와 억설이 불러온 피바다의 붉은 송이들, 그토록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죽었다.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왜 우리끼리 죽여야 했단 말인가. 양중탁 시인은 제주도에서 태어나 제주사범학교를 나온 시조시인으로서 시조시단에서는 드물게 4ㆍ3사건을 이번에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이렇게라도 그는 일가친척들과 마을 어르신네들, 친구와 동생들의 한을 풀어드리고 싶었던 것이리라.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사랑의 탐구』, 『우리들의 유토피아』,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공포와 전율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