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담
시린
우리 할머니 집은
한라산 잘 보이는 비탈에
볕도 잘 들고
고운 꽃이 늘 피어 있어요
밭 가운데 있어서
귤 따다 힘들면 담에 기대 쉬기도 하고
참도 먹고
할머니 저 왔어요 이야기도 하지요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옛날에 너무 못살아서
할머니는 집 한 채 못 지어보고
흰쌀밥 한번 배불리 못 먹었대요
할머니는 엄마한테
제사도 올리지 말라 했는데
엄마는 제일 좋은 집 지으려고
아빠랑 매일 돌을 날랐대요
귤 따다 참 먹을 땐
제일 먼저 할머니한테
쌀밥 한가득 퍼 드리고
어머니, 많이 드세요, 하지요
나는 이제 할머니 얼굴이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어른들 말이 우리 엄마 얼굴 보면
할머니랑 있는 것 같대요
ㅡ『어멍 닮은 섬 노래』(한그루, 2022)에서

<해설>
‘산담’이란 무덤 뒤에, 반달 모양으로 두둑하게 둘러쌓은 흙더미를 말한다. 제주도에 특히 많다. 한자로는 ‘사성(莎城)’이라고 한다. 할머니의 집, 즉 할머니 무덤이 밭 가운데에 있다. 귤을 따다가 힘들면 산담에 기대어 쉬기도 하고 참도 먹고 할머니한테 얘기를 걸기도 한다. 아이는 엄마한테서 할머니 얘기를 듣는다. 땅 한 뙈기도 없었는지 집도 짓지 못하고 살았었고, 흰쌀밥 한번 배불리 먹어본 적이 없는 할머니에 대한 얘기를.
왜 할머니는 딸에게 제사를 올리지 말라고 했을까. 제사상 차리는 것이 힘들고 번거로울 테니 그런 것 안 해도 된다고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내 엄마는 악착같이 집을 지었다. 그리고 노년의 할머니한테 쌀밥을 가득 퍼 드리곤 하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제사상을 차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가난과 허기에 주눅 들지 않으려고 한 엄마의 억척이 잘 느껴진다. 나는 할머니 얼굴이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어른들 말이 네 엄마를 보면 할머니랑 같이 있는 것 같다고 하니 딸이 엄마 안 닮으면 누굴 닮으랴.
시린(본명 서은석) 시인은 제주도에 정착한 뒤에 샅샅이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시와 동시를 썼다. 그래서 사진 수백 장을 곁들여 낸 이번 시집을 보면 제주도 곳곳의 풍경과 인심과 역사를 알 수 있다. 며칠 놀러 갔다가 맛있는 것 먹고 오는 제주도 관광객은 알 수 없는, 제주도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책이 바로 『어멍 닮은 섬 노래』이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사랑의 탐구』, 『우리들의 유토피아』,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공포와 전율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