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 딸에게
박인환
기총과 포성의 요란함을 받아가면서
너는 세상에 태어났다 주검의 세계로
그리하여 너는 잘 울지도 못하고
힘없이 자란다.
엄마는 너를 껴안고 3개월 간에
일곱 번이나 이사를 했다.
서울에 피의 비와
눈바람이 섞여 추위가 닥쳐오던 날
너는 입은 옷도 없이 벌거숭이로
화차(貨車) 위 별을 헤아리면서 남으로 왔다.
나의 어린 딸이여 고통스러워도 애소(哀訴)도 없이
그대로 젖만 먹고 웃으며 자라는 너는
무엇을 그리 우느냐.
너의 호수처럼 푸른 눈
지금 멀리 적을 격멸하러 바늘처럼 가느다란
기계는 간다. 그러나 그림자는 없다.
엄마는 전쟁이 끝나면 너를 호강시킨다고 하나
언제 전쟁이 끝날 것이며
나의 어린 딸이여 너는 언제까지나
행복할 것인가.
전쟁이 끝나면 너는 더욱 자라고
우리들이 서울에 남은 집에 돌아갈 적에
너는 네가 어데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그런 계집애.
나의 어린 딸이여
너의 고향과 너의 나라가 어데 있느냐
그때까지 너에게 알려줄 사람이
살아 있을 것인가.
ㅡ『목마와 숙녀』(근역서재, 1976)에서

<해설>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해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중단되었다. 끝난 전쟁이 아니다.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두 나라는 지금도 자유 왕래를 할 수 없고 북한의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는 사흘이 멀다 하고 미사일을 쏘아대며 호전성을 드러내고 있다. 미사일을 원하는 곳에 떨어뜨릴 수 있다고 하는데 사정권은 이미 한반도의 남쪽이 아니다.
박인환 시인의 부인 이정숙 여사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해의 9월 25일에 딸 세화를 낳았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한강 다리를 한국 공군이 다 파괴하는 바람에 남쪽으로 피난을 가지 못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국군이 서울을 되찾는 9월 28일까지 온 가족이 여러 곳 지하방에서 숨어 지냈다. 이정숙은 임신한 상태에서 한국전쟁 당시의 포성을 매일 들어야 했고 남편이 구해 오는 쌀로 밥을 지어 먹어야 했고 입덧을 했고 9ㆍ28 수복 사흘 전에 딸을 낳았다. 이 시는 박인환 시인이 그렇게 태어난 딸을 애처롭게 바라보면서 쓴 것이다.
아이는 잘 울지도 않고 힘없이 자랐다. 3개월 동안 일곱 번 이사했는데 숨을 곳을 찾아다닌 이사였다. 가족이 화물열차를 타고 대구로 피난 간 것은 그해 12월 8일이었다. “눈바람이 섞여 추위가 닥쳐오던 날/너는 입은 옷도 없이 벌거숭이로/화차(貨車) 위 별을 헤아리면서 남으로 왔다.”고 했다. 아이는 얼마나 떨었을까. 그 무렵 이런 고통을 당한 아이는 또 얼마나 많았을까. 박인환은 이듬해 경향신문사 기자로서 부산과 대구를 오가며 취재했고 가을에는 좀 더 안전한 부산으로 이사했다. 이런 상황이니 나중에 전쟁이 끝나 서울에 가더라도 딸이 태어난 집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중공군의 갑작스런 전쟁 개입으로 전황이 아주 어둡게 돌아갈 때 쓴 이 시는 딸이 제대로 자라줄지 알 수 없어 불안해하는 아빠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사랑의 탐구』, 『우리들의 유토피아』,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공포와 전율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