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가 읽은 이 시를’ (87) / 봄은 왔지만 봄이 아니다 – 유용주의 ‘소한’
이승하 시인의 ‘내가 읽은 이 시를’ (87) / 봄은 왔지만 봄이 아니다 – 유용주의 ‘소한’
  • 이승하
  • 승인 2023.03.28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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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송희 에디터
사진=한송희 에디터

소한 

유용주


고라니가 캥캥 우는
산골 추위 한번 맵구나

봉화산에서 내려오는 물소리 들리지 않는다

물이 얼면 소리가 막히는 법
이 겨울 누구를 비난할 것인가

계곡은
밖으로 풀어지는 마음을
안으로 싸안고 겨울을 견딘다
침묵을 채찍질한다

소리가 막히면 바람이 먼저 어는 법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은
세상 가장 낮은 말씀이시다

봄은 실패해도 좋은 역성혁명인가

무혈 입성하는 저들을
두 손 놓고 바라봐야 하나

말이 막히면 만백성이 어는 법
흰옷 입은 사람들 흘린 피
겨울잠 자고 있다

꿈결까지 따라오던 물소리 꽝꽝
깊은 잠 들어 있다

우수
경칩은 도대체
어느 바다에서 상륙한 말씀들인가

구름마저 얼어붙어
하늘이 무연고 시신으로 떠내려오는 머나먼 이곳
아침의 나라
동방의 차디찬 불빛!

ㅡ『서울은 왜 이렇게 추운겨』(문학동네, 2018)

사진=뉴스페이퍼 제작
사진=뉴스페이퍼 제작

<해설>

 소한이 더 추운가 대한이 더 추운가. 막상막하다. 내 어렸을 때는 한강 전체가 꽝꽝 얼어 걸어서 건널 수 있었는데 요즘엔 그런 해가 없는 걸 보면 지구 전체가 따뜻해진 것이 맞는가 보다. 지구온난화에 상관없이 전북 장수군에서 살고 있는 유용주 시인에게 그곳의 소한은 고라니가 추워서 캥캥 울 만큼 추운 때란다. 그런데 봄은 반드시 온다. 얼음장 밑으로는 물이 흐른다.

 이 시는 흔하디흔한 봄노래가 아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봄은 실패해도 좋은 역성혁명인가”이 이르면 이 시에서의 봄이 정치적인 봄이나 사회적인 봄임을 알 수 있다. 역성혁명(易姓革命)이란 고대 중국에서 만들어진 말로, 천명(命)이 바뀌는(革) 것이 혁명이고, 대개 지도자의 가문이 바뀌기 때문에 새 왕조는 전 왕조와 다른 성(易姓)을 갖게 되기에 역성혁명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의 경우 정권이 여에서 야로, 혹은 야에서 여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우리와 이웃 나라인 일본의 자민당과 중국의 공산당, 그리고 푸틴의 공산당은 오랫동안 1당독재를 하는 나라다. 우리도 여당인 공화당과 민정당이 오랫동안 집권했지만 민주화의 바람이 불어 야당이 여당이 되기도 한다.

 “말이 막히면 만백성이 어는 법/흰옷 입은 사람들 흘린 피/겨울잠 자고 있다”는 구절에 시선이 오래 머문다. 이 시가 씌어진 때가 박근혜 씨가 대통령일 때임을 상기해보면 봄이 왔지만 봄이 온 게 아니라는 말이다. 인도의 타고르는 일찍이 1929년에 식민지 조선을 가리켜 ‘동방의 등불’이라고 노래했는데 박근혜 대통령 때도 지금도 세상은 차디찬 불빛이라 우리는 추워서 떨고 있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사랑의 탐구』, 『우리들의 유토피아』,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공포와 전율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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