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삼촌의 행불
정원도
외할아버지 얼굴은 알 턱도 없네
노름판에 무릎 거덜나 일찍이 세상 버린 탓
외할머니 틈만 나면 사라진 아들 그리워했는데
훤칠한 키에 빼어난 용모로
하루에도 백 리 걸어 훌쩍 다녀오신댔네
사라졌다가 나타나기 대중없더니
광복 몇 년 지나지 않아 영영 행불
큰외삼촌 소식 묻기만 하면 꺼지던 한숨 뒤로
전쟁 중에 피난 돌아오니
외할아버지 빈소에 촛불 켜진 흔적과 인민복 한 벌
쌀밥 한 고봉에 쇠고깃국 차려진 것도
위태한 비밀이 되었고
‘붉은 기 손에 든 채 쓰러질 적에
뒷일은 염려 마라 내가 있으니
외로운 소나무 밑 내가 죽은 줄 누가 알겠나’
야학에서 배웠다는 노랫말만 흥얼거려도
인물 났다던 큰외삼촌 행불이 짐작되었네
ㅡ『말들도 할 말이 많았다』(천년의시작, 2023)에서

<해설>
뜻하지 않은 상황에서 해방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때는 좌익이든 우익이든, 공산주의자든 자유민주주의자든 공동의 목표가 있었다. 독립운동을 해서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당위 앞에서는 이데올로기가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국도 일본의 침략이 있자 국공합작을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느닷없이 해방이 되자 신탁통치 찬성파(좌익)와 반대파(우익)로 나뉘어 피 튀는 싸움을 전개하였다. 결국 38선이 놓였고 분단이 되었고 전쟁이 일어났다. 시의 내용이 정원도 시인 자기 집안의 일인지 아닌지 확인을 해보지는 않았다.
외할아버지는 도박에 미쳐 인생을 일찍 마감하였다. 큰외삼촌은 저쪽 사상에 물들어 “영영 행불”, 즉 월북을 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남쪽의 가족은 피난을 갔다.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을 때 돌아와 보니 집에 외할아버지한테 제사를 지낸 촛불 흔적이 남아 있었다. 큰외삼촌이 이들 앞에 나타난 것이 확실하다. 큰외삼촌 덕분에 전시임에도 쌀밥과 고깃국(제사상에 올라갔던 것)을 먹어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휴전협정 후 이들이 큰외삼촌을 만났다는 사실은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는 금기요 비밀이었다. 쌀밥과 고깃국을 준비할 수 있었다는 것은 큰외삼촌의 신분이 꽤 높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화자의 어머니는 야학에서 그쪽의 노래를 배웠다고 한다. 즉, 전쟁 중에 이들 가족은 이른바 ‘적 치하’에 있었던 것이다. 휴전협정 체결 후 남과 북 사이에는 휴전선이 놓이게 되었고, 나와 큰외삼촌과의 만남은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았다.
화자는 아주 침착한 자세로 그때의 일을 회상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집이 어디 한두 집이랴. 소설가 김원일, 이문열의 아버지, 시인 이근배의 아버지가 월북자였다. 북한에서는 ‘핵심 계층’ ‘동요 계층’ ‘적대 계층’으로 분류되어 신분의 벽을 넘어서는 것이 불가능하고, 남한에서는 아주 오랫동안 연좌제가 시행되었다. 가족의 생사 여부도 알 길이 없게 된 남북의 이산가족은 오늘도 한숨을 내쉬며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사랑의 탐구』, 『우리들의 유토피아』,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공포와 전율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