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가 읽은 이 시를’ (104) / 세월호를 잊지 말아야 하는데 – 이승하의 ‘물이 차오르고 있다’
이승하 시인의 ‘내가 읽은 이 시를’ (104) / 세월호를 잊지 말아야 하는데 – 이승하의 ‘물이 차오르고 있다’
  • 이민우
  • 승인 2023.04.14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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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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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송희 에디터
사진=한송희 에디터

물이 차오르고 있다

이승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삶을 향해 나아가는 시간과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
뭘 하는가 이젠, 시간이 없다

발목을 적시는 물 
종아리로 차오르는 물 
실뱀처럼 물이 기어 올라오고 있다
냉담한 물이 어쩜 이리 무자비하게 

허벅지로 배꼽으로 가슴으로 
목으로 입으로 코로 눈으로 이마로
마가복음 1장 8절*이 
누구의 뇌리를 스쳐 하늘나라로 갔을까 

마침내 온몸이 물에 잠겼다 
마침내 침몰한 우리들의 양심
바다는 하늘과 땅을 향해 미친 듯이 울부짖고   
뒤집어진 배에서, 세월의 피가 솟구치고 있다

*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ㅡ『예수ㆍ폭력』(문학들, 2020)에서

사진=뉴스페이퍼 제작
사진=뉴스페이퍼 제작

<해설>

 수학여행을 가려고 세월호라는 배에 탄 단원고 학생들의 죽음을 다시금 애도한다. 학생이 대다수인 승객 304명이 죽은 참사가 일어난 지 어언 9년이 되었다. 배에다 물품을 잔뜩 실었고, 선박을 무리하게 개조했고, 사고시 운전 미숙인 조타수가 급회전을 했고, 선장과 선원들이 구조작업에 나서지 않고 탈출을 했고, 해양경찰청과 해양수산부와 중앙사고수습본부가 우왕좌왕하면서 계속해서 잘못된 발표를 했고……. 잠수부들의 이동을 돕는 대형바지선이 침몰 5일째인 4월 20일에야 투입되었으니 기가 막힌 일이었다. 하루 뒤에야 수습본부에 모습을 나타낸 박근혜 대통령은 이상하게도 몽롱한 얼굴로 횡설수설하였다. 한국의 이런 꼴을 보다 못한 오바마 대통령이 주한미군에게 구조작업에 나서라고 긴급명령을 내렸다. 

 사고 이후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정부 당국의 누군가가, 사고 현장의 누군가가 사과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아니, 구조된 단원고 교감이 자살하였다. 이것이 어떻게 나라라고 할 수 있으며 정치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런데 작년 11월 7일, 이태원에서 압사 사고가 일어나 축제를 즐기려 길 가던 사람들이 155명이나 죽었다. 누가 사과를 했는가? 책임을 졌는가? 

 9년 전 그날, 물이 학생들의 발목에서부터 시작하여 종아리로, 허벅지로, 배꼽으로, 가슴팍으로, 목으로 차오르는 동안 어른들은 무엇을 했는가. 아이들이 물속에서 숨이 멎었을 때 나는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기도만 하고 있었다. 이 나라에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싶다. 반만년 역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싶다. 그날이 다가오니 또다시 세월의 피가 솟구친다. 진도 앞 팽목항 근처, 바다만 미친 듯이 울부짖고 있다. 학생들 유가족분들께 교육자 중 한 사람인 이 못난 어른이 애도의 마음을 전한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사랑의 탐구』, 『우리들의 유토피아』,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공포와 전율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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