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가 읽은 이 시를’(138)/ 광주를 다시 생각하면서–이승하의 「5월의 광장에 서서」
이승하 시인의 ‘내가 읽은 이 시를’(138)/ 광주를 다시 생각하면서–이승하의 「5월의 광장에 서서」
  • 이승하
  • 승인 2023.05.18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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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송희 에디터
사진=한송희 에디터

5월의 광장에 서서

이승하


21세기에 태어날 아이들은
알까 알게 될까
먼 옛날이야기를 듣듯이
5월의 학살극을 들을
이 땅의 아이들은 알고 있을까
아르헨티나ㅡ지구 반대편
‘5월 광장 어머니회’ 사무실에 걸린
그 많은 실종자들의 얼굴을
찾지 못한 이유를

21세기에 태어날 아이들아
알고 있거라
1973년 9월 11일
칠레 산티아고에서 울린 포성을
알고 있거라
민선 대통령 아옌데를 누가 죽였는지를
알고는 있어야 한다
1980년 5월 18일
대한민국의 광주에서 울린
총성의 의미도

누가 쏘라고 했는지를
왜 죽이라고 했는지를
알고 있거라
20세기에 태어난 아이들아
무엇 하나 밝혀내지 않고
거기에 공원을 만들지 않고
거기에 희생자의 이름을 새긴 탑조차 세우지 않고
1999년 12월 31일의 자정을 맞을 아이들아
거대한 무덤 위에 선
20세기에 태어난 아이들아.

ㅡ『생명에서 물건으로』(문학과지성사, 2022)에서

사진=뉴스페이퍼 제작
사진=뉴스페이퍼 제작

<해설>

 오늘은 5ㆍ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이다. 1980년 5월 중순 무렵 중앙대학교 1학년 남학생 일동은 군부대에 입소하여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다. 훈련이라기보다는 얼차려를 계속해서 받았다. 나가서 데모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주는 벌이었다. 저녁을 먹고 내무반에 들어왔을 때 어느 학생이 말했다. 광주에서 큰 사건이 일어났대. 사람들이 많이 다쳤대. 전국 대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대. 라디오를 들었다는 것이다.  

 밤에 학생 대표들이 몰래 모여 숙의했다. 우리 중앙대도 휴교 중일 텐데 우리가 여기서 군사훈련 받고 있는 게 말이 돼? 일단 퇴소했다가 광주에서의 사태를 보고 재입소를 하던가 하자. 날이 밝아 훈련소장에게 몰려가 호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꾸지람과 함께 오늘 일자 훈련이나 잘 받으라는 말을 듣고 물러 나왔다. 수백 명 학생들이 밖에서 하던 대로 연병장을 돌면서 시위를 했다. 연병장에서 시위한 것은 건국 이래 처음이자 마지막 있었던 일이었을 것이다. 1시간이 채 못 되어 군용트럭이 열 대 가량 들어오더니 연병장 가에 죽 서는 게 아닌가. 트럭에서 뛰어내리는 이들은 말로만 들었던 공수특전단이었다. 데모 진압 훈련인 ‘충정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았나 보았다. 얼굴이 까무잡잡했고 바짝 말라 있었다. 눈만 반짝반짝했다. 진압봉을 들고 있는 그들 앞에서 우리는 훈련 잘 받고 퇴소하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들은 광주로 갔을 것이다. 아르헨티나 군사정권도 지독하였다. ‘5월 광장의 어머니회’는 1976년에서 1983년까지 아르헨티나를 통치한 군사정부의 ‘더러운 전쟁(Guerra Sucia)’ 기간 동안 실종된 사람들의 어머니들이 만든 단체다. 대통령이 된 비델라 장군은 좌익을 퇴치한다면서 고문이나 살인 같은 행위를 정당화했다. 반정부단체에 대해서는 폭력적인 탄압을 자행, ‘더러운 전쟁’이라 불리는 비델라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3,000명에 달하는 사람이 재판 없이 사형당하고 수만 명의 시민이 실종되거나 국가 보안군에 의해 비밀리에 살해되었다. 나는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와 한국의 상황을 비교해보았다. 둘 다 5월이기에. 칠레도 엄청났다. 영화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를 강추한다. 21세기가 된 지 20여년이 흘렀는데 우리는 아직도…….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사랑의 탐구』, 『우리들의 유토피아』,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공포와 전율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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