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가 읽은 이 시를’(139)/ 신을 더 이상 팔지 마세요–김종경의 「저물어 가는 지구를 굴리며」
이승하 시인의 ‘내가 읽은 이 시를’(139)/ 신을 더 이상 팔지 마세요–김종경의 「저물어 가는 지구를 굴리며」
  • 이승하
  • 승인 2023.05.19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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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뉴스페이퍼 제작
사진=뉴스페이퍼 제작

저물어 가는 지구를 굴리며

김종경


오일장마다
‘믿음천국, 불신지옥’을 부르짖는
붉은 조끼들이
천국행 암표를 팔고 있다

십자가를 등에 진 종말론자는
옆구리에 스피커를 매단 채
그분이 너희 죄를 사했노라고,

여장 남자 각설이는
호박엿은 구원이 아니라
만 원에 네 개라며,
이미 구원을 받은 듯
찬송가보다 더 크게
뽕짝을 불러댔다

누런 푸들을 앞에 태운
노인의 전동휠체어는
호박엿으로 구원을 받았는지
서둘러 귀가하고

땅바닥을 끌며
찬송가를 부르는 박물 장수에게
천 원짜리 면봉과
편지 봉투 한 묶음을 사는
사람들,
그가 애벌레를 닮았다며
그림자마저
조심스레 비껴가고

그는 오늘도 온몸으로
저물어 가는 지구를 굴리며
노을 밖 세상을
구원 중이다

ㅡ『저물어 가는 지구를 굴리며』(별꽃, 2022)에서

사진=한송희 에디터
사진=한송희 에디터

<해설>

 경기도 용인의 오일장 모습을 스케치한 시편이다. 종교인인지 종교를 사칭한 사기꾼인지 붉은 조끼를 입고 ‘믿음천국, 불신지옥’을 부르짖으며 천국행 암표를 파는 사람들이 있다. 20세기 말에는 10년 가까이 이런 이들이 지하철 안이나 역 광장에서 종말이 온다고 외치면서 우리 교회로 오라고 전도하였다. 그들이 든 피켓에는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할 날짜가 있다고 하면서 몇 년 몇 월 며칠을 써놓았다. 

 시인은 그들을 풍자하고 조롱한다. 호박엿은 9원이 아니라 만 원에 네 개라며 이미 구원을 받은 듯 찬송가보다 더 크게 뽕짝을 불러대고 있으니 말이다. 신이 약속한 구원의 역사를 몸으로 보여주는 이가 있으니 “땅바닥을 끌며/찬송가를 부르는 박물 장수”다. 시장 바닥을 기면서 면봉과 봉투를 팔고 있는 것이지만 시인의 상상력은 그가 저물어 가는 이 지구를 온몸으로 굴리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이야말로 노을 밖 깜깜한 이 세상을 구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대한민국 사회에서 이른바 ‘사이비 종교’가 창궐하고 있다. 어느 종교가 사이비이고 어느 종교가 사이비가 아닌지 헷갈릴 때도 있다. 여신도 성폭행 혐의로 구속된 JMS 정명석은 사이비 종교의 교주임이 틀림없다. 14명 변호인단 중에서 7명이 사임해 7명이 남아 있다고 하는데 이들이 정명석을 위해 어떤 변론을 펼지 궁금하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사랑의 탐구』, 『우리들의 유토피아』,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공포와 전율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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