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명씨
홍일표
그의 숙소는 을지로입구역 지하도다
밤이 되면 박스 안에 들어가 잔다
종이로 만든 네모반듯한 관
미리 죽음을 산다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온다
온종일 돌아다니며 폐지를 줍고
몇 푼의 돈으로 술과 밥을 사 먹는다
줄을 서서 한 끼 식사를 해결하기도 한다
지하도에 종이 관이 늘어난다 전쟁터도 아닌데 가족도 고향도 없는 여러 구의 시신이 여기저기 놓여 있는 것 같다
지난밤 죽음을 연습하며 잠들었던 노인이 깨어나지 않는다
식당에서도 더럽다고 쫓겨난
당뇨로 발이 썩어 가던 강원도 고성 사람
새해 첫날 스스로 준비한 관에서 나와 노인이 떠났다
노인이 품고 다니던 가방 안에서
어린 딸과 아들이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누가 알까
오래 연습한 죽음의 힘으로
마지막 숨을 몸 밖으로 슬그머니 밀어냈다는 것을
ㅡ『조금 전의 심장』(민음사, 2023)에서

<해설>
내가 사는 동네에서 제일 가까운 지하철역에는 노숙자가 한 명 있다. 낮에는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밤 귀갓길에 꼭 그분을 보게 된다. 60대나 70대 노인인데 신문을 어디서 구해 오는지 늘 읽고 있고 취직을 하고 싶은지(?) ‘벼룩시장’ 같은 것도 꼼꼼히 읽고 있다. 지난겨울에도 지하도에서 박스를 집 삼아 이불 삼아 살아가고 있었다. 샤워를 지하철 화장실에서 하는지 궁금했다.
홍일표 시인은 을지로입구역 지하도에서 살아가는 무명씨 노숙자를 시의 소재로 삼았다. 시인의 눈에는 박스가 미리 들어가 본 관으로 비쳤고, 그래서 “미리 죽음을 산다”고 했다. 어느 지하철역은 노숙자들이 꽤 많아서 “여러 구의 시신이 여기저기 놓여 있는 것 같다”는 표현이 실감 난다. 그분들 중에는 밤에 숨을 거두는 분도 있으리라. 이 시에는 “노인이 품고 다니는 가방”이 나오는데 내가 사는 동네 지하철역의 그분도 꼭 여행자 트렁크를 끼고 산다.
홍일표 시인의 시에는 “당뇨로 발이 썩어 가던 강원도 고성 사람”이 나오는데 그의 가방 안에는 “어린 딸과 아들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고 한다. 노숙자도 어느 부모의 자식이고 어느 자식의 부모일 것이다. 그런데 집을 나와서 길에서 잔다. 그 고성 출신 노숙자는 “오래 연습한 죽음의 힘으로/마지막 숨을 몸 밖으로 슬그머니 밀어내고”는 숨을 거두었다. 붓다도 제자들과 순례 중에 배탈이 나서 죽었으니 일종의 행려병자였다. 우리도 인생행로 어느 지점에 이르면 이 노숙자처럼 숨을 거둘 것이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사랑의 탐구』, 『우리들의 유토피아』,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공포와 전율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