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가 읽은 이 시를’(152)/ 세상 사는 게 뭐 그런 것을–김연종의 「사각지대」
이승하 시인의 ‘내가 읽은 이 시를’(152)/ 세상 사는 게 뭐 그런 것을–김연종의 「사각지대」
  • 이승하
  • 승인 2023.06.01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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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송희 에디터
사진=한송희 에디터

사각지대

김연종  


시집 한 권 보내고 싶었는데 주소를 물어보기는 겸연쩍고 주소를 알 만한 단서는 보이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다가 누구인지 가물거리고

혼사 소식을 들었는데 모바일 단체 청첩장이라 가기도 쑥스럽고, 안 가기도 체면이 아니라
계좌번호만 확인했는데 날짜가 지나가 버리고

신문 동정란 보고 병원장 등극한 동창 소식 접했는데 축하 전화도 축하난도 어색해서
우물쭈물하다 보니 어느새 퇴임 소식

부고를 접하고 망자 대신 장례식장을 확인하는데 주중에는 시간이 없고 주말에는 거리가 멀어
핑계 대신 반가운 계좌번호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보조미러를 달고
두 눈 부릅뜨고
귀 활짝 열고

말없이 ‘좋아요’만 누르고 사라진 지인에게
메신저를 통해 안부나 전할까
전화로 직접 목소릴 확인할까 고민하다가
다시 들어가 보니
이미 페친 삭제

ㅡ『애지』(2023년 여름호)에서

사진=뉴스페이퍼 제작
사진=뉴스페이퍼 제작

<해설>

 이 시를 읽은 독자라면 십중팔구 ‘내 얘길 하고 있네’라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현대인의 삶이란 게 이렇다. 아차하면 ‘아뿔싸’가 되고 어어하면 ‘어럽쇼’가 된다. 일일이 다 챙기고 배려하며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 어느 누구의 일상적 삶에 있어서도 사각지대가 있는 법이다. 언제나 믿음직한 친구, 언제나 효성스런 자식, 언제나 든든한 백은 없다. 인간은 누구나 사각지대에 놓여 있기도 하다.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수도 하고 경범죄도 짓고 뼈저린 반성도 하는 것이다.

 내과전문의로서 개업 의사인 김연종 시인은 현재 한국의사시인협회 회장이기도 하다. 매사 일처리가 휴가병의 군복처럼 깔끔하고 칼이 서 있는데 설마 이게 자기 얘기일까?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엄벙덤벙 살아가는 게 김연종 시인 본연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선 이렇게 구체적으로 그릴 수 없기 때문이다. 

 보조미러를 달고, 두 눈 부릅뜨고, 귀 활짝 열고 운전해도 눈에 안 들어오는 사각지대가 있었다는 것이 운전자 김연종의 고백이다. 세상 살아가면서 별 지적 안 받고 살고자 그렇게 애를 썼지만 잘 안 되더라고 시인은 고백한다. 매사 깔끔하게 일 처리를 하는 이를 보면 나도 부럽다. 아아, 그런데 건망증이 오면, 치매기까지 오면!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사랑의 탐구』, 『우리들의 유토피아』,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공포와 전율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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