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가 읽은 이 시를’(154)/ 돈 돈 하다가 돈다–이광의 「젊은 날의 나에게」
이승하 시인의 ‘내가 읽은 이 시를’(154)/ 돈 돈 하다가 돈다–이광의 「젊은 날의 나에게」
  • 이승하
  • 승인 2023.06.03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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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송희 에디터
사진=한송희 에디터

젊은 날의 나에게

이광

1
돈이면 다 통한단 그딴 말 곧이들어
머리맡 책도 덮고 가슴에 둔 붓도 꺾고
하늘을 우러러보던 눈길마저 거두었다

한때는 정의롭게 잔을 높이 들었건만
시대의 호명 앞에 못 들은 척 외면하고
오로지 돈 돈 돈 하며 동동거린 날 좀 보소

부지런 떨었지만 둘러보니 긴 한숨만
세상이 베푼 것은 벼랑 같은 생의 단면
손에 쥔 부도난 어음 조각조각 찢던 그날

공사장 한구석에 삽질하던 내가 있네
빚더미에 몰린 구렁 견디니까 물러가고
뒤늦게 고개를 들어 두 눈 가득 담은 하늘

2
허욕에 얽매인 몸 꼴도 보기 싫었으리
내가 미워 떠난 이후 꿈에서나 접한 소식
젊은 날 풋풋했던 모습이 어디 숨어 지냈는가

이제 그만 돌아오게 말동무 되어주게
스스로 북돋우고 기꺼이 꿈을 좇던
정열의 로맨티스트여 부활하라, 내 안에

ㅡ『열린시학』(2023년 봄호)에서

사진=뉴스페이퍼 제작
사진=뉴스페이퍼 제작

<해설>

 시조는 현실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이광 시조시인은 자본주의하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을 추적하였다. 이상을 버리고 현실에 충실히 적응해 살겠다고 “오로지 돈 돈 돈 하며 동동거린” 나날이었으면 한 재산 모았어야 했는데 “손에 쥔 부도난 어음 조각조각 찢던 그날”이었으니 말짱 도루묵이 되었다. 그래서 공사장 한구석에서 삽질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IMF 때 이런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래서 화자는 다시금 이상을 추구했던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하지만 몸은 늙었고 마음은 지쳤다. “스스로 북돋우고 기꺼이 꿈을 좇던/정열의 로맨티스트여 부활하라, 내 안에” 하고 부르짖어 보지만 이것은 한낱 소망일 뿐,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이광 시조시인이 한 인터뷰를 보았다. 즉, 이 작품은 자기와 이웃들 이야기다. 즉, 실화다.

 “8년 만에 회사를 나와 사업을 몇 년간 하다가 IMF 영향으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막노동 일을 하면서 마루 시공을 배웠어요. 기능이 있었던 터라 후에 노후주택 재건사업현장에서 일도 했습니다. 자식에게 버림받고 낡은 집에서 홀로 쓸쓸히 살아가는 노인들과 궁핍한 생활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내가 겪는 시련은 별 것 아니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고, 삶이라는 큰 운명의 흐름이 무언지 깊이 생각했습니다. 몸으로 일하는 현장에서 만난 일용직 노동자들에게서 순수함, 성실성을 보았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많은 감정이 교차했는데, 그 경험이 시조를 쓰는 자양분이 되어주었습니다.”

 시조도 이처럼 현실을 다루어야 한다. 이 땅에서 씌어지는 시조의 80〜90%가 자연을 다루고 있는데 시조시인의 80〜90%가 도시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도시가 공간적 배경이 되는 경우는 가뭄에 콩 나듯이 드물다. 시조가 음풍농월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독자들이 외면할 것이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사랑의 탐구』, 『우리들의 유토피아』,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공포와 전율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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