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밤
윤홍조
슬금슬금 거리에 어둠의 그림자 내려오면 하얀 속살 부신 여자 하나 어느새 길목 나와 서성인다
기약 없는 사랑의 향기로움 하르르 쏟아버릴 듯 부푼 몸을 간신히 어둠에 등 기대어 싸안고 있다
휘영청 달 밝은 밤일수록 더욱 낭창낭창 휘늘어진 달그림자 몸짓에 길목의 발길들 언뜻, 눈먼 사랑인가 가슴 덜컥, 발길 멈춰서는 황홀한 몸 색의 여자 하나
온밤 어른어른 나를 따라온 향긋한 기다림 못내 눈앞에 밟혀 살금살금 담장을 흘러드는 은밀한 살내음에 밤새 정분난 가슴들 잠 못 이뤄 뒤척이는
창밖, 난분분 난분분 꽃물 흘리는
밤 벚꽃!
―『웃음의 배후』(천년의시작, 2023)

<해설>
이 시를 쓴 이가 여성인 것이 일단 놀라웠다. 여성을 향한 남성의 갈망을 알 턱이 없을 텐데,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세상의 뭇 남자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봄밤에, 열어놓은 창밖으로 벚꽃이 난분분 난분분 꽃물 흘리듯이 떨어지는데, 꽃냄새가 그대의 방을 꽉 채우는데, 아무 생각 없이 잠이 오겠냐고.
근년에 읽은 시 가운데 이보다 더 에로틱한 시를 읽은 적이 없다. “하얀 속살 부신 여자 하나”, “하르르 쏟아 버릴 듯 부푼 몸”, “황홀한 몸 색의 여자 하나”, “은밀한 살내음에 밤새 정분난 가슴들”, “꽃물 흘리는 밤 벚꽃”이라니 내 가슴이 마구마구 방망이질 친다. 아아, 왜 이러세요. 이러심 안 됩니다. 외치고 싶다.
시인은 봄밤에 바람이 불었고, 벚나무에서 꽃들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서 이 시를 썼을 따름이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벚나무 같은 여자를 보고 몸이 달아오른 남자를 어쩜 이렇게 잘 묘사하고 있을까. 이 시는 사실 하얀 속살이 눈부신 여자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의 달뜬 마음에 대한 묘사이다. 옛날 설화를 보면 사물이 사람으로 둔갑하는 얘기가 종종 나오는데 그런 설화의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간 느낌이 든다. 대개의 경우, 남자는 간도 쓸개도 다 내준다. 나라도, 그런 경우라면…… 죽어도, 좋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사랑의 탐구』, 『우리들의 유토피아』,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공포와 전율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