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가 읽은 이 시를’(250) 비누 하나의 철학―김태실의 「비누」
이승하 시인의 ‘내가 읽은 이 시를’(250) 비누 하나의 철학―김태실의 「비누」
  • 이승하
  • 승인 2023.09.08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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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누

김태실


덩어리가 녹아 틀에서 단단하게 굳었어
문지를수록 순해지며 가벼워지는 나이
닳고 닳아 어려지면 우리끼리 모여
한 번 더 거품을 게워내는 잔치를 열지

사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어
살구씨유의 밍밍하고 맛없는 바탕에 색깔과 향기가 섞여
꽃, 물고기, 빵 등 다양한 얼굴이 되었지
어떤 모양이든 마지막 순간까지 이름을 배반하지는 않아

눈뜨면 앞에 있고 말하면 들리는 거리에서
언제나 널 기다려
심장에 박힌 멍, 마음에 묻은 먼지를 지우려고
네가 쏟은 눈물의 이유를 데리고 떠나려고

나는 뼈를 갖고 있지 않아서 원망도 없어
구름 모양 바뀌고 계절 빛 변해도 
기억 어디쯤 잠들어 있는 향긋한 이름
그것으로 충분해
너의 통증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나는 괜찮아 

ㅡ『겨울새의 발목에도 눈물이 돋는다』(중앙대 문예창작전문가과정 문집 7집, 2023)

<해설>

 비누 재료로는 온갖 것이 다 있다. 비누의 모양도 천차만별이다. 우리는 비누를 왜 사용하는가? 비누를 사용해 손을 씻고 얼굴을 씻는다. 비누는 대체로 단단한 고체지만 물과 섞어 문지르면 거품을 내는 묘한 성질이 있다. 비누는 냄새가 향기로워 다른 사람한테서 비누 냄새가 풍겨오면 상쾌한 기분이 든다. 강신재의 명작 단편소설 「젊은 느티나무」는 첫 문장이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이다.

 이 시의 특징은 비누를 의인화해 시적 화자를 비누로 한 것이다. 그런데 감정을 갖고 있는 비누가 제3연에 가면 자기희생적인 태도를 취한다. 비누거품이 눈에 들어가면 따가워서 눈물이 나는데 이런 물리적인 현상을 넘어서 비누는 이성에 대한 연모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제4연에 가면 사랑고백에 가까운 말을 한다. 나는 뼈를 갖고 있지 않아서 원망도 없다고.

 대상과 맞서지 않고 순종만 하는 것이 이 시대의 사랑법은 아니다. 하지만 그저 베풀기만 하면서 점점 더 줄어들다 결국은 사라지는 비누의 운명을 감내하겠다는 존재를 탄생시켰기에 이 시는 가치를 획득한다. 비누는 상대방의 통증을 사라지게 할 수도 있다. 시는 일반론이 아니라 특수론이며, 상식이 아니고 예외이며, 거품이 아니고 단단한 물상이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사랑의 탐구』, 『우리들의 유토피아』,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공포와 전율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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