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가 읽은 이 시를’(253) 이육사가 노래한 한 개의 별―이육사의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이승하 시인의 ‘내가 읽은 이 시를’(253) 이육사가 노래한 한 개의 별―이육사의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 이승하
  • 승인 2023.09.11 20:46
  • 댓글 0
  • 조회수 166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미지=한송희 에디터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이육사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꼭 한 개의 별을
십이성좌 그 숱한 별을 어떻게 노래하겠니 
 
꼭 한 개의 별! 아침 날 때 보고 저녁 들 때도 보는 별
우리들과 아주 친하고, 그중 빛나는 별을 노래하자
아름다운 미래를 꾸며볼 동방의 큰 별을 가지자

한 개의 별을 가지는 건 한 개의 지구를 갖는 것
아롱진 설움밖에 잃을 것도 없는 낡은 이 땅에서
한 개의 새로운 지구를 차지할 오는 날의 기쁜 노래를
목 안에 핏대를 올려가며 마음껏 불러보자

처녀의 눈동자를 느끼며 돌아가는 군수야업(軍需夜業)의 젊은 동무들
푸른 샘을 그리는 고달픈 사막의 행상대(行商隊)도 마음을 축여라
화전에 돌을 줍는 백성들도 옥야천리(沃野千里)를 차지하자

다같이 제멋에 알맞는 풍양한 지구의 주재자로
임자 없는 한 개의 별을 가질 노래를 부르자

한 개의 별 한 개의 지구 단단히 다져진 그 땅 위에 
모든 생산의 씨를 우리 손으로 휘뿌려보자
앵속(罌粟)처럼 찬란한 열매를 거두는 찬연엔
예의에 끄림없는 반취(半醉)의 노래라도 불러보자

염리(厭離)한 사람들을 다스리는 신이란 항상 거룩하니
새 별을 찾아가는 이민들의 그 틈엔 안 끼어 갈 테니
새로운 지구에다 죄없는 노래를 진주처럼 흩이자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다만 한 개의 별일망정 
한 개 또 한 개의 십이성좌 모든 별을 노래하자

―『풍림』(1936. 12)

이미지=뉴스페이퍼 제작

<해설>
                                    
 12개 성좌를 이루고 별의 수는 너무 많아서 헤아릴 수조차 없다. 육안으로도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천체망원경으로는 더더욱 헤아릴 수 없다. 그런데 이육사는 한 개의 별을, 꼭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고 운을 뗀다. 우리와 아주 친하고 그중 빛나는 별은 새벽에 집을 나설 때나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도 볼 수 있는 별이니 금성(샛별)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아름다운 미래를 꾸며볼 동방의 큰 별”이니 단지 금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상의 별, 혹은 이념의 별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기실 이 시에서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별을 노래한 대목이 아니다. 이육사는 엉뚱하게도 제4연에 이르러 세 무리의 사람들을 불러 세운다. 

 첫 번째는 “처녀의 눈동자를 느끼며 돌아가는 군수야업의 젊은 동무들”이다. 군수공장에서 철야작업을 하고 돌아가는 젊은 공장노동자들이 보는 새벽별이다. 그들의 머리 위에는 아직 사라지지 않고 별이 하나 있을 것이고, 그들은 애인이나 누이의 눈동자를 생각하며 지친 몸으로 집으로 간다. “푸른 샘을 그리는 고달픈 사막의 행상대”도 샛별을 보며 마음을 축였으면 좋겠다고 한다. “화전에서 돌을 줍는 백성들도 옥야천리를 차지”했으면 좋겠다고 한다. 화전민의 삶은 대체로 연명이나 생존에 가깝다. 밤이 깊도록 돌을 줍고 있는 저 백성들이 기름진 땅을 천리나 차지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은 다 같이 “제멋에 알맞는 풍양한 지구의 주재자”들이다. 공장에서 새벽에 나와, 사막을 건너가면서, 또 산야에서 돌을 주우면서 별을 보는 이들이 “임자 없는 한 개의 별을 가질 노래를 부르자”고 한다. 

 그러니까 이 시에서 별은 일하는 사람들의 소망이요 이상이다. 현실은 가난하고 고되지만 별을 보면서, 별을 노래하면서 희망을 잃지 말자고 권유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에게 별은 친구요 친지요 동반자요 안내자다. 그래서 “모든 생산의 씨를 우리 손으로 휘뿌려보자/ 앵속처럼 찬란한 열매를 거두는 찬연엔/ 예의에 끄림없는 반취의 노래라도 불러보자”고 하면서 거듭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것이다. 이 시에서 예찬의 대상은 생산의 주체로 살아가는 근로자들이다. 근로계급에 대한 이육사의 신뢰감을 엿볼 수 있는 시다. 다시 말하면 그 시대의 유한계급이나 귀족계급은 대체로 친일파들이었던 바, 민중에 대한 무한신뢰를 엿볼 수 있다. 또한 부정하고 싶은 부류는 “렴리한 사람들”과 그들을 다스리는 신이다. 염리(厭離)는 불교용어인데, 세상이 싫어 속세를 떠난 사람들을 가리킨다. 붓다를 신이라고 하지는 않으므로 이 구절은 모순적인 요소가 있다. 아무튼 그가 기독교도이든 불자이든 간에 “새 별”, 즉 거룩하고 숭고한 세계를 찾아서 가는 이민자들 틈에는 안 끼어 가겠다고 이육사는 스스로 다짐하기도 한다. 종교인들은 부처님이나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생각하겠지만 이육사는 우리 스스로 “새로운 지구에다 죄없는 노래를 진주처럼 흩이자”고 하면서 자력갱생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마지막 연에서는 한 개 한 개 별을 노래하다 보면 12성좌 모든 별을 노래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즉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존귀하므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낱낱이 격려하고 예찬하면 결국 나중에는 모든 별이 다 노래로 불려진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별은 사람이요, 일하는 사람이라야 별처럼 반짝이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이육사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었던 말이리라. 87년 전의 작품인데도 눈물 나게 감동적이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사랑의 탐구』, 『우리들의 유토피아』,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공포와 전율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