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가 읽은 이 시를’(258) 좋은시를 쓰고 싶지만―최보윤의 「1, 2 중 마음에 드는 버전으로 읽어주세요」
이승하 시인의 ‘내가 읽은 이 시를’(258) 좋은시를 쓰고 싶지만―최보윤의 「1, 2 중 마음에 드는 버전으로 읽어주세요」
  • 이승하
  • 승인 2023.09.16 04:00
  • 댓글 0
  • 조회수 161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진=한송희 에디터
사진=한송희 에디터

1, 2 중 마음에 드는 버전으로 읽어주세요  
―좋은시

최보윤

1
좋은시
하나씩
내 방 벽에
붙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왔을 때
보여주려고

깨보니
당신은 없고
좋은시는
쓰여진 적 없다

2
꿈에서
몇 장의 
좋은 시를
읽었습니다

당신께
보여주려
방 벽에
붙였습니다

깨어서
시는 잊어도
그것만은
분명했습니다

ㅡ『정형시학』(2023년 가을호)

이미지=뉴스페이퍼 제작
이미지=뉴스페이퍼 제작

<해설>

 시조 같지 않은 시조라서 좋다. 정형이라는 닫힌 공간에서 열린 세계를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시조를 열심히 찾아서 읽는 20대, 30대 독자가 있는지 모르겠는데, 최보윤 시인의 이런 시조가 있으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아직도 봄에는 천편일률적인 봄노래가, 가을에는 구태의연한 가을노래가 시조시단에서 보여 한숨을 내쉬다(꼭 계절의 변화를 다룬 시조가 아니라 할지라도) 이런 시조를 보니 무척 반갑다.   
  
 등단한 지 이제 4년 된 최보윤 시인은 시조집을 한 권 낸 바가 있으니 아직은 신인이다. ‘좋은시’에 대한 열망이 왜 없겠는가. 1번 시조는 “좋은시는/쓰여진 적 없다”는 것이 결론이다. 2번 시조는 양상이 다르다. 꿈에서는 좋은 시를 읽기도 했고 방 벽에 붙이기도 했는데 깨어나 보니 일장춘몽, 시는 기억도 나지 않고 좋은 시를 읽고서 벽에 붙인 행위만 기억이 난다. 결국 ‘좋은시’는 보지도 못했고 쓰지도 못했다. 아아 어떻게 할 것인가. 

 좋은 시, 시조 쓰기가 쉽지 않다. 쓰는 작품마다 명작이면 얼마나 좋으랴. 졸작, 태작, 범작……. 해설자도 시집을 내보지만 괜찮은 시는 몇 편 안 된다. 최보윤 시인은 앞으로 뻔한 시조는 절대 쓰지 말고 산뜻한, 혹은 참신한 시조를 쓰기 바란다. 시조는 어차피 정형을 지켜야 하는 것이 숙명인데, 그 숙명을 감당하면서도 일신우일신, 현대시조의 감각을 추구하지 않으면 찬란한 전통을 복제만 하게 된다. 그대 시조의 독자가 늘 20대, 30대라고 생각하고 써주면 좋겠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사랑의 탐구』, 『우리들의 유토피아』,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공포와 전율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