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가 읽은 이 시를’(261) 이름값을 해야 하는데―이복현의 「이름」 
이승하 시인의 ‘내가 읽은 이 시를’(261) 이름값을 해야 하는데―이복현의 「이름」 
  • 이승하
  • 승인 2023.09.19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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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한송희 에디터

이름

이복현


아무개라 하면
모를 리 없는

반짝반짝 빛이 나는 이름들이
세상엔 많다

닳고 닳아
윤이 나는 이름들

고명할수록
더 많이
굴러먹은 흔적이 역력하다

겉은 빛나지만
가만히 눈여겨보면
온갖 오물에 젖은
진때가 묻어 있다

반지르르한
겉 품새만 보다가
어찌, 어쩌다가
현미경으로 들여다볼 양이면
오만 잡균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오, 위대하신 
병든 이름들이여!

ㅡ『사라진 것들의 주소』(천년의시작, 2023)

이미지=뉴스페이퍼 제작
이미지=뉴스페이퍼 제작

<해설>

 살아생전에는 아주 유명했는데 사후에 잊혀진 존재가 있는가 하면, 생전에는 무명이었는데 사후에 새롭게 평가되는 수도 있다. 고명할수록 더 많이 굴러먹은 흔적이 역력하다는 구절 앞에서는 섬뜩해짐과 함께 소름이 돋았다. 나를 두고 한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고명하지는 않지만 닳고 닳아 윤이 나는 이름을 갖고 있지 않은지 모르겠다. 

 시인 박인환이 재평가되고 있고 김수영에 대한 그간의 고평에 문제가 있다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허먼 멜빌이나 제인 오스틴, 볼프강 보르헤르트 같은 이들도 사후 한참 지나서야 평가가 되기 시작했다.

 시인이 보건대 이 세상에 꽤 유명한 사람의 이름이 허명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름이 부풀려지고 업적이 과장되고 과대평가가 된 사람일 경우라도 사후 10년만 흐르면 그 실체가 드러난다. 물론 위에 예로 든 외국의 소설가는 훨씬 더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야 평가를 받게 되었지만 말이다. 자신의 이름이 허명이 되지 않으려면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데, 사람의 일이란 것이 뜻대로 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어쨌거나 “병든 이름들” 속에 내가 들어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사랑의 탐구』, 『우리들의 유토피아』,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공포와 전율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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