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22) / 순명하는 마리아 - 신달자의 ‘네’
네
신달자
네, 저는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게 하소서
“네”
이천 년 전
이 짧은 대답 하나로
거친 광야를 다 안아 들인 여자
어린 나이에 두렵고 떨리는 그 생을 받아 안았으므로
그 예리한 칼로 찌르는 예언에의 순명에 자신을 바쳤다
성모마리아
네, 네 대답 하나 던지고
머뭇거리지 않고 덥썩 받아 안은 몸
나는 나의 종이어서
네
내가 내게 대답하고
달아나면서 달아나면서 어쩔 수 없이 받는 못
네 그 짧은 대답 하나로
성령으로 처녀 몸에 아이를 가지고
그 아이 섬기며
그 아이 피땀을 입술로 닦은 여자
가슴에 받은 그 못이
그 아이의 살을 뚫고 들어가는
인류 구원은 못으로 시작하였으니
인류 구원은 피로써 이루어졌으니
인류 구원은 그 아이의 죽음으로 이루어졌으니
네 그 짧은 대답 하나가
인류와 한 세상을 구원하였으나
네 네 네
오늘 나는 이 짧은 대답을 내일로 미루고 있네.
—『간절함』 (민음사, 2019)

<해설>
성경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수태고지와 처녀잉태의 뜻을 잘 알 것이다. 천주교에서는 성모마리아란 존재를 아주 소중하게 여긴다. 그래서 해마다 5월을 성모성월로 정해 그분의 역할을 되새기기도 한다. 죽은 예수의 몸을 안고 비탄에 잠긴 성모마리아의 모습을 묘사한 미술적 주제인 피에타(pietà)가 그림과 조각의 소재가 종종 되었던 것도 아들의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자식이 전쟁터에서 죽었을 때 겪는 어머니의 슬픔을 성모마리아가 상징하기 때문이다.
신달자 시인은 성모마리아를 순명하는 인물로 그리고 있다. “네”라는 짧은 대답 하나로 거친 광야를 다 안아 들였다고 한다. 짧은 대답 하나가 인류와 한 세상을 구원했는데 “오늘 나는 이 짧은 대답을 내일로 미루고” 있다. 의구심도 많고 불성실하기까지 한 자신을 이렇게 질책하고 있다. 반성하고 있다. 순명과 비슷한 색조의 낱말로 허용ㆍ수용ㆍ이해ㆍ복종 등이 있을 법한데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말이 “네”이다. 누가복음 1장 38절의 이 말, “네, 저는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게 하소서”는 우리에게 성모마리아의 인품을 잘 알려준다. 공손함과 겸손함을, 희생정신과 자애(慈愛)를, 순명과 인내를 몸소 실천했던 이가 성모마리아였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