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40) / 날 알아보지 못하는 어머니 - 류정희의 ‘어머니’
어머니
류정희
서울 규수 섬으로 시집오던 날
배 타고 사흘 길이었는데요
귀 막고 입 다문 시집살이 할 적에
거제도 사투리를 연필로 써 가며 익혔다는데요
책장 넘기며 보았던 모진 가난뿐
예단으로 가져온 재봉틀 밤낮 돌렸다는데요
어르신 결혼 기념으로 마당가에 수양 버드나무
한 그루 심었다는데요
자라는 자식들 보며 모질게 살았다는데요
눈코 뜰 새 없이 재봉틀 돌리다 문득
그리워지는 어머니
수양 버드나무 가지 흔들며 한참씩 울었다는데요
엄마 세상 뜨자 소문났던 수양 버드나무
추우나 더우나 가지 늘어뜨리고
고향 찾아 엄마 뵙듯 안아 보면 눈곱 낀 얼굴
날 알아보지 못하는데요 설레설레 고개 흔들며
날 알아보지 못하는데요
—『당신은 지금도 오고 있다』(도서출판 포엠포엠, 2019)

<해설>
최명희 대하소설 『혼불』이 이 한 편의 시에 녹아들어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 여인의 생애가 17행의 시 속에 고스란히 들어 있으니 말입니다. 서울말을 쓰는 서울내기 규수가 거제도로 시집갔습니다. 귀 막고 입 다물고 견딘 시집살이야 그렇다 치고 가난하기까지 한 집이었으니! 재봉틀이 자식들 교육을 다 시켰습니다.
이 시의 주인공은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수양 버드나무이기도 합니다. 서울의 어머니가 그리워질 때마다 “수양 버드나무 가지 흔들며 한참씩 울었다는” 화자의 어머니. 서울의 어머니(화자의 할머니)가 돌아가셨어도 가보지 못했나 봅니다. 수양 버드나무도 세월의 흐름을 어쩌지 못했는지 축축 처져 늙은 티가 나나 봅니다. 거제도의 ‘엄마’는 수양 버드나무와 동일시됩니다. 눈곱 낀 얼굴인데다 설레설레 고개 흔들며 날 알아보지 못합니다. 치매 화자가 된 화자의 엄마와 함께 늙어간 수양 버드나무는 바로 ‘엄마’의 온갖 설움을 다 받아준 절친한 친구였던 것입니다. 설움을 하소연할 수 있던 오직 한 명의 친구.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