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03) / 백발노인의 힘 - 최일화의 ‘노인과 땡감’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03) / 백발노인의 힘 - 최일화의 ‘노인과 땡감’
  • 이승하 시인
  • 승인 2020.02.1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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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03) / 백발노인의 힘 - 최일화의 ‘노인과 땡감’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03) / 백발노인의 힘 - 최일화의 ‘노인과 땡감’

  노인과 땡감
  
  최일화


  백발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절룩절룩 가고
  나는 저만치 떨어져 터덜터덜
  노인의 뒤를 걷고 있다
  갑자기 노인이
  반듯하게 몸을 세우더니
  지팡이를 높이 들어 힘껏 내리친다
  무엇인가 박살이 나면서 날아간다

  가까이 가서 보니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땡감
  나도 왕년에 골프깨나 쳤다고
  마음은 지금도 청춘이라고

  노인은 다시 
  절룩절룩 앞서서 가고
  나는 터덜터덜 노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초가을 바람이
  나를 앞지르고 노인을 앞질러
  저만치 내달리고 있었다

  ―『마지막 리허설』(시인동네, 2019)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03) / 백발노인의 힘 - 최일화의 ‘노인과 땡감’ [이미지 편집 = 김보관 기자]

  <해설>

  아마도 시인은 산책길에서 이 백발노인의 돌출행동을 보고 깜짝 놀랐던 것이리라. 지팡이를 짚고 다리까지 절며 가던 백발노인이 무언가를 보았다. 갑자기 반듯하게 몸을 세우더니 지팡이를 높이 들어 힘껏 내리쳤다. 박살이 나면서 날아간 것은 땡감이었다. 이 대목이 재미있다. “나도 왕년에 골프깨나 쳤다고/ 마음은 지금도 청춘이라고”

  특별한 상상력이나 낯선 시적 표현을 동원하지 않은, 지극히 평이한 시임에도 불구하고 이 시에 내 영혼을 울린 것은 “초가을 바람”의 의미를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추풍낙엽, 즉 때가 지면 떨어지는 것이 잎사귀의 운명이듯이 우리 인간도 생로병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다 때가 되면 멈춘다. 하지만 문득, 무엇을 보면 필드에서 공을 하늘 높이 쳐 올리던 시절이 생각나지 않겠는가. 어느 순간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지팡이를 휘두른 백발노인의 모습이 참 재미있다. 한번 멋지게 포즈를 잡아보고는 다시 지팡이를 짚고 절룩절룩 걸어가는 백발노인의 뒷모습이 ‘귀엽다’고 한다면 실례가 될까.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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