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선자 역의 김한봉희 배우와 김영준 역의 김영준 배우 [사진 = 김보관 기자]](/news/photo/202009/75567_48301_1133.jpg)
[뉴스페이퍼 = 김보관 기자] 완연한 가을,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연극 “우리집에 손주며느릿감이 온다”가 찾아왔다. 2003년 창단된 극단 공외가 올리는 이번 연극은 방혜영 작, 연출로 할머니 장선자와 손주며느릿감 방선자의 시대를 초월한 연대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서울시 공연업 회생 프로젝트 선정작인 “우리집에 손주며느릿감이 온다”는 사회적 거리두기 좌석을 구비해 넓고 안전한 관람 환경을 갖추고 있다. 뉴스페이퍼는 코로나 시국으로 어려운 공연예술계의 상황 속에서도 신선한 연극으로 찾아온 극단 공외를 찾아보았다.
![장선자의 집에서 만난 세 사람 [사진 = 김보관 기자]](/news/photo/202009/75567_48302_1214.jpg)
밥상을 마주한 두 사람 사이, 좁힐 수 없는 마음의 거리
극은 ‘영준’의 할머니 장선자의 집에서 시작한다. 놀라우리만치 생생히 재현된 일상의 공간에 손자 영준과 그의 연인 방선자가 도착하며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인다.
밝은 웃음과 붙임성 있는 성격으로 할머니 장선자의 마음을 녹인 젊은 선자. 구김이라고는 전혀 없을 것 같은 그는 저녁 준비를 앞두고 홀로 거실에 남는다. 쉬고 있으라는 할머니의 권유에 뉴스를 보던 선자는 돌연 한 소식 앞에서 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한다. 중학생 시절 자신에게 성폭력을 가한 선생님이 교육감이 되었으며 누군가 ‘미투’ 고발을 했다는 소식이다.
![방선자 역의 조아라 배우 [사진 = 김보관 기자]](/news/photo/202009/75567_48303_1256.jpg)
![언쟁을 벌이는 선자와 영준 [사진 = 김보관 기자]](/news/photo/202009/75567_48304_139.jpg)
이 와중에 미투 폭로자는 갖가지 오해와 억측에 놓인다. 거짓 고발을 한 게 아니냐는 시선들도 존재한다. 그의 용기에 힘을 실어주어야겠다고 결심한 어린 선자와 이를 만류하는 영준. 손님맞이에 한창인 할머니가 자리를 비운 사이 주인공 영준과 선자의 언쟁은 시작되고 커다란 상이 한가득 차려진 이후에도 미묘한 긴장감이 감돈다.
![밥상 앞에 마주 앉은 세 사람 [ 사진 = 김보관 기자]](/news/photo/202009/75567_48306_1342.jpg)
기다란 밥상 앞에 앉은 세 사람. 셋이 사용하기에는 다소 큰 크기의 나무 상은 성폭력 피해 고발을 바라보는 영준과 선자 사이의 거리감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도무지 좁혀질 수 없는 두 사람의 마음은 둘 사이의 거리 그 이상으로 동떨어져 있다.
![작, 연출을 맡은 극단 공외 방혜영 대표 [사진 = 김보관 기자]](/news/photo/202009/75567_48307_141.jpg)
“밥을 먹을 때는 이야기도 나누고 즐거운 마음으로 먹어야 하잖아요. 하지만 극에서는 밥상 앞에서 싸움이 일어나고 영준이 감추려는 사실이 들통납니다. 아무런 말이 없는 가운데 들리는 식재료들의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요. 밥을 먹는 방식이나 장면들을 통해 인물들 사이의 감정선이나 분위기를 보여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방혜영 대표와의 인터뷰 중에서.
![젊은 선자의 아픔을 들은 장선자 [사진 = 김보관 기자]](/news/photo/202009/75567_48308_1445.jpg)
50년의 세월을 잇는 두 여성의 아픔과 연대
“우리집에 손주며느릿감이 온다”에서는 실제 ‘할머니집’에서 볼 수 있었던 다양한 소품들을 발견할 수 있다. 흔히 사용하는 물건들과 낡은 집기는 우리 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인물들의 특징을 더욱 강조한다.
“후반에 밥씬이 들어가면서 세팅에 시간이 들어요. 하지만 이번 연극에서는 현장에서 느낄 수 있는 소리와 냄새가 중요해요. 일상성을 살리는 역할을 하는 거지요. 극의 첫 장면 평범한 일상을 보여주며 시작하잖아요. 우리는 ‘성폭력’이라면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처럼 느끼곤 하는데 실은 모두 다 이어져 있다고 생각해요. TV 소리, 세탁기 소리. 일상에 있을 법한 감각들로 동시대성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잠에서 깨어 일상을 보내는 선자의 모습 [사진 = 김보관 기자]](/news/photo/202009/75567_48310_161.jpg)
디테일을 살린 무대 배경과 소품이 그러하듯 두 인물의 이름이 같은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극의 말미에 이르러 ‘성폭력 피해자’라는 공통점이 드러난 두 사람. 두 명의 ‘선자’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은 피해 상황 앞에서 오십 년의 시간을 넘어 함께 연대한다.
평생 피해 사실을 숨기고 산 할머니 장선자가 젊은 선자의 결정을 지지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연대와 더불어 피해자들의 의사 결정권에 대해 고민해보게 된다. 때로 폭로를 강요받거나 폭로를 저지당하는 피해자들이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세상은 언제쯤 가능할까?
극단 공외 방혜영 대표는 “성폭력 피해 사실은 본인이 밝히기 싫으면 안 밝힐 수도 있다. 반대로 밝히고 싶다면 밝힐 수도 있어야 한다.”는 당연한 말이 가능할 수 있는 사회를 꿈꿨다.
![장선자 역의 김한봉희 배우와 김영준 역의 김영준 배우 [사진 = 김보관 기자]](/news/photo/202009/75567_48311_1641.jpg)
국군 위안부, 잊힌 역사
이번 연극에서는 할머니 장선자는 실제 한국에서 존재했던 국군 ‘위안부’ 피해자다. 2018년 초연 당시에는 일본군 ‘위안부’였던 인물 설정이 이번 연극에서는 국군 ‘위안부’로 변경된 것이다.
“보급품으로 온 드럼통에서 여자들이 나오더라고...”
김귀옥 연구자의 자료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 국군 ‘위안부’로 끌려간 피해자는 300명 가까이 되는 것으로 추산된다. 관련한 문건과 전쟁에 참여했던 남성들의 증언도 존재한다. 하지만 한국군 위안부 피해 당사자의 증언은 단 한 건도 없다.
무엇이 피해자들의 입을 굳게 닫히도록 했는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우리는 연극 “우리집에 손주며느릿감이 온다”를 통해 지워지고 잊혀 가는 역사를 발견하게 된다. 연극 “우리집에 손주며느릿감이 온다”는 다소 낯설 수 있는 국군 ‘위안부’를 가까운 현실의 성폭력과 연결해 먼곳의 이야기가 아닌 지금 이곳의 이야기를 전한다.
![할머니 장선자의 사연을 듣는 두 사람 [사진 = 김보관 기자]](/news/photo/202009/75567_48312_1721.jpg)
유쾌한 가족 코메디로 시작해 왈칵 눈물을 쏟게 만드는 “우리집에 손주며느릿감이 온다”를 쓴 방혜영 대표는 끝으로 “오셔서 누구든 마음껏 울고 갔으면 좋겠다.”는 마지막 인사를 덧붙였다. 상처받은 이들에게는 ‘울 수 있는 자유’를, 그들의 곁에 선 이들에게는 또 다른 공감과 이해의 방법을 제시하는 연극 “우리집에 손주며느릿감이 온다”. 관객들은 코와 입을 막은 갑갑한 현실 속에서 하나의 숨통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