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엘
-이혜미
음악에도 껍질이 있지 악보는 겹겹의 껍질로 둘러싸인 사탕이어서 나는 껍질도 까지 않은 사탕을 입에 넣고 굴리며 아 달콤하네, 맛있다, 그렇게 한 시절을 보냈다 말하자면 사탕을 입에 넣기도 전에 혀끝에 피맛이 퍼지는
창이 작은 연습실
손이 매운 선생
한 곡 다 칠 때까지 절대
벗어날 수 없었지 검은 건반만 골라 연주하던 유년의 뒤편에서 아직도 서투른 아리랑이 머물고 아직 연습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소리들이 아 달다, 향기롭게도 입속을 맴도는데
음악이란 매 순간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 첫 곡도 제대로 못 끝내 음표들을 외로이 남겨둔다고, 그래서 평생 하나의 곡만을 아껴가며 연주하는 사람이 되었지 멍든 손가락을 들여다볼 때마다 아직 펼쳐보지 않은 악보 냄새가 나
연습실 창으로 한 조각 볕이 들 때, 소리 없이 건반에 쌓인 먼지를 일으켜 춤추게 했지 조금 느리게 ― 도도솔솔라라솔, 다만 소리의 껍질들을 오래 꿈꾸게 하려고
<시작 노트>
불확실한 어둠이 성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한때 빛나던 성문과 기둥, 기쁨으로 솟아오르던 분수는 이제 말라붙어 이끼조차 사라졌어요. 당신이 기억하시는 지구는 지독한 불모의 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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