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편지
오래된 편지
  • 이대흠
  • 승인 2022.11.01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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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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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1994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는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1997), 『상처가 나를 살린다』(2001), 『물 속의 불』(2007), 『귀가 서럽다』(2010),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2018) 등이 있으며, 장편소설 『청앵』(2007), 『열세 살 동학대장 최동린』(2018) 등이 있다. 연구서로는 『시문학파의 문학세계 연구』(2020), 『시톡1』(2020), 『시톡2』(2020), 『시톡3』(2020) 등이 있으며, 산문집 『그리운 사람은 기차를 타고 온다』(2000), 『이름만 이삐먼 머한다요』(2007), 『탐진강 추억 한 사발 삼천 원』(2016) 등이 있다. 조태일문학상, 이육사시문학상-젊은시인상, 전남문화상 등을 수상하였다.

큰형은 싱가포르로 돈 벌러 가고
마루에는 고지서만 쌓였다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하신 어머니는
어깨너머로 겨우 한글을 깨쳤지만
혼자서 편지 쓰기에는 무리였다
보일러공인 큰형 덕분에 나는 중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고
어머니가 입으로 쓰시는 편지를
양면지에 옮기는 일을 하였는데
맞춤법도 없는 편지는 큰형을 곧잘 울리고

큰 아이야 여기도 이렇게 더운데 남의 나라에서 얼마나 땀 흘리면서 고생하느냐? 네 덕분에 아이들 학비 걱정은 없다만 이 어미가 너를 볼 낯이 없다 네 아버지도 잘 있고 아이들도 잘 있으니까 아무 걱정 하지 말고 건강 관리 잘하여라 지난번 편지에 내 무릎 아프냐고 물었는데 내 몸은 아무렇지도 않으니 걱정을 하지 말아라

그럴 때면 나는
편지에는 계절 인사가 있어야 한다고 우겨댔는데
그러면 어머니는,

소쩍새가 우는 걸 보니 밤이 깊었구나
대문간에 있는 수국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이러다가,

그 까짓 거 뭐하려고 쓴다냐
그냥 몸이나 안 아픈지 어떤지 그것이 더 중요하지

너희는 형이 언짢지도 아니 하냐?
뙤약볕에서 내 자식이 피땀 흘려 번 돈을
호박씨 까먹듯이 톡톡 끊어서 먹고 있으려니 기가 막히려 하는데
이번 월급도 다 써버리고
너희 형 나오면 통장이나 하나 줘야 할 것인데
어미 아비 있는데 도와주지도 못하면서
하면서 이내 눈물 글썽이셨는데,

이쯤 되면 나는 어머니가 했던 말을 마음대로 버무려
편지를 썼는데,

큰 아이야 엄마다 더운 데서 일하느라고 고생이 매우 많지 여기도 이렇게 더운데 너는 오죽하겠느냐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네가 나오면 통장 하나 주려고 아끼고 아낀다만 이번 월급도 아이들 납부금 내고 농협 빚 조금 갚고 나니 한 푼도 안 남았다 정말이지 내가 엄마지만 할 말이 없다 더운 나라에서 피땀 흘리고 있을 너를 생각하면 기가 막히고 숨이 막히려 한다만 어쩌겠느냐 별 방법이 없다 못자리 할 때부터 울던 소쩍새가 또 우는 것을 보니 밤이 상당히 깊은 모양이다 네가 작년 가을에 심어
놓고 간 국화도 상당히 컸다 강변 밭에는 고구마랑 콩을 심었는데 아까 낮에는 아이들 데리고 가서 밭을 맸다 날이 너무 더워서 아이들은 풀 조금 매고 나서 물놀이를 하더라 아이들 물놀이 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서 아아 우리 큰 아이는 더운 데서 얼마나 고생을 할 것인가 생각을 하니 눈물이 나더라 모쪼록 여기는 아무렇지도 않으니 네 몸 하나 건강하게 잘 지키기 바란다 편지를 쓴다고는 쓰지만 네 얼굴을 볼 면목이 없어서 어찌 할 것이냐 못난 엄마가 괜히 우리 큰 아이만 고생시키고 있구나 네가 그렇게 피땀 흘려서 번 돈을 하나도 모으지 못하고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 아이들이 크면 네 덕을 알는지 모르겠다만

이쯤 쓰고 있노라면 어머니 눈에는 눈물이 글썽이고, 나는 어머니가 불러준 대로 그대로 썼어요 하고는
편지 말미에

큰형 나 대흠인데, 어머니 시방 울고 있어요. 큰형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부터 흘린다니까요. 모쪼록 몸 건강하게 잘 지내시고, 나올 때 샤프펜슬 꼭 잊지 마세요.

하고 두어 마디 붙이곤 하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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