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황 5
이승하
금전 몇 푼을 위한 출근길
수백 일 벽을 마주해야 오도송을 읊을까
오전 9시 15분 전, 2호선 전철 속
손끝 하나 제대로 움직이기 힘든
타인의 숨결이 뒷덜미로 느껴지는
초여름 초만원 전철 속에서
코피가 터진다
황급히 고개를 쳐든다
턱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피를
닦을 수 없다
피는 넥타이와 와이셔츠를 적시지만
닦을 수 없다
피는 왈칵 밀려드는 사람의 파도 속에서
타인의 등에도 묻지만
닦아줄 수 없다
내 피가 당신의 등을 더럽혔노라고
사과할 수도 없다
밟고 밟히는 발
사과의 말 대신
소리 죽인 신음, 기어드는 비명
이 많은, 많고 많은 사람 가운데
양옆의 두 사람만이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는데, 그때
내 착잡한 마음속에 흘러드는
한 줄기 빛
이렇게도 살아가는구나 여기서도
내 이렇게 존재해 있음을 느끼는구나
그럼 열반에의 길도 찾을 수 있겠구나.
―『생명에서 물건으로』(문학과지성사, 2022년 재판 1쇄)에서

<해설>
(자작시를 해설하려니 많이 쑥스럽다. 여러 선배시인들이 자작시 해설집을 발간했기에 용기를 내보았다.)
대학 강단에 서기 전에 10년 넘게 샐러리맨 생활을 했다. 쌍용에 7년 반을 근무했는데 을지로3가에 본사가 있었다. 2호선 지하철이 제일 붐비는 시간대에 타고 다녔으니 아침 출근길이 전쟁터였다. 여름에는 회사에 당도하면 와이셔츠가 땀에 젖을 정도였다. 내려야 할 때 인파에 밀려 내리지 못해 ‘내려요!’ ‘내립니다!’ 비명을 지르곤 했다. 승객이 꽉 차 타지 못하고 다음 차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 차에 탄 승객이 더 많을 때는 정말 절망스러웠다.
어느 날 부서 회식이 있었다. 1차 저녁 회식 때 소주 몇 잔 반주를 했는데 2차는 호프집에 갔었고 3차 가서는 양주까지 마시고 대취하고 말았다. 샐러리맨이 전날 만취될 정도로 마셨다고 다음날 결근하거나 지각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와이셔츠 입고 넥타이 메고 지하철역으로 달려갔다.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시각이었다. 그래서 더 붐비는 시간에 지하철을 탔다. 그날 일어난 상황은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두 팔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코피가 터진 것이다.
당혹스러웠고 어찌할 도리가 없었지만 내가 그래도 살아 있으니 다행이 아닌가, 내 주변에 있는 이 모든 사람이 그래도 일이 있어 출근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모두 짐짝이 아니고 생명체인 것을.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몇 정거장을 갔다. 나는 상황이 절망적일 때 이상하게도 희망이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습벽이 있다고 할까, 역발상을 하며 난관을 타개하곤 하는데, 그때 바로 그랬었다.
이 땅에는 샐러리맨들이 있다. 공장노동자를 블루칼라라고 하고 사무직 회사원을 화이트칼라라고 한다. 정신노동을 주로 하는 화이트칼라라고 비애가 없을까. 나는 요즘에도 출퇴근 시간에 회사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보이면 인사를 하고 싶다. 수고 많습니다. 고생이 많습니다. 힘드시죠?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사랑의 탐구』, 『우리들의 유토피아』,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공포와 전율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