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가 읽은 이 시를’(268) 그 시대를 산 아버지들을 위한 송가―강성철의 「재산상속포기 청구」 
이승하 시인의 ‘내가 읽은 이 시를’(268) 그 시대를 산 아버지들을 위한 송가―강성철의 「재산상속포기 청구」 
  • 이승하
  • 승인 2023.09.26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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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한송희 에디터

재산상속포기 청구 

강성철 


아버지를 포기하려고 가장 아버지를 닮았다는 내가 
“살아서 평생 고생만 시키더니……”라며 한숨짓는 
어머니 모시고, 법원 간다 
십수 년 전 어느 날인가? 
술 한 잔에 운전면허증도 없는 아버지가
덜렁 차주(車主)가 되어 돌아왔다고 하신다 
그 후 각종 벌금이 아버지 앞으로 배달되고 
살아생전 당신이 한 번도 타보지 못한 그 차 
의정부 어딘가에 무단 방치되어 있다고 연락이 온 지 얼마 안 되어
폐차처럼 쓸모없게 된 아버지
폐차처럼 분해되어 저승 가시고 

평생을 주위 사람들에게 속아서만 살아온 아버지 
각종 보증은 도맡아 하시더니 무엇이 그리 섭섭하신지 
폐차를 타고, 빚이 되어 다시 살아 돌아왔다 
재산만 상속되는 게 아니라 
빚도 상속된다는 이야기를 들으신 어머니 
“이젠 줄 게 없어서 빚까지 주는구나
젊어서는 사상범으로, 나이 들어서는 각종 보증으로, 
말년엔 똥오줌까지 받아내게 하더니……” 
아버지처럼은 살지 말라고 늘 당부하시던 어머니 
오늘따라 굽은 등이 더욱 굽어 보인다 

아버지를 포기하러, 아니 나 자신을 포기하러 법원 간다 
내 몸속에 깃들어 있는 아버지를 부정하러 법원 간다 
잘 익은 수세미처럼 속이 텅 빈 골다공증의 아버지를 포기하면서 
아버지처럼 온몸의 부속품들이 
하나씩 마모되어가는 나 자신을 본다 
부정하면 부정할수록 더욱 고개를 내미는 아버지 
질긴 인연의 줄 같은 햇살을 타고, 기우뚱거리는 고물차로 
술 취한 당신이 내 안으로 들어온다 

ㅡ『슬픈 아일랜드』(시인동네, 2023)

이미지=뉴스페이퍼 제작

<해설>

 시적 화자의 아버지는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마음이 약한 탓에 “각종 보증은 도맡아 하시더니” 돌아가시고도 “빚이 되어 다시 살아 돌아왔다”고 한다. 빚도 상속이 되기 때문에 아버지를 ‘포기’하러 법원에 가는 아들이 있다면 그 속마음은 갈가리 찢어지지 않을까. 

 어머니는 남편이 지긋지긋할 것이다. “젊어서는 사상범으로, 나이 들어서는 각종 보증으로, 말년엔 똥오줌까지 받아내게 하더니” “이젠 줄 게 없어서 빚까지” 물려준다. 원수도 이런 원수가 없다. 평생 식구에게, 특히 아내에게 고통을 준 가장은 저승에 가서 편히 쉬고 있는데 그의 아내와 아들은 법원에 가고 있다.

 소설 같지만 이런 일들이 정말 있었다. 일제강점기, 해방공간, 한국전쟁, 전후의 궁핍한 상황을 겪은 이 땅의 아버지들은 안정된 세상에서 살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가정을 지키지 못한 가장들이 많았다. 한 권의 소설을 압축한 듯한 이 시를 읽어보니 그 시절을 산 불량한(?) 아버지들이 다 애처롭고, 그분들을 위해 묵념하고 싶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사랑의 탐구』, 『우리들의 유토피아』,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공포와 전율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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